◆'무경총요'에서 말한 조선하는 오늘날 북경의 어떤 강일까
북경의 지세는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다. 서부, 북부, 동북부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은 발해를 향해 있다.
현재 북경시 경내를 흐르는 주요 하류는 영정하永定河, 조백하潮白河, 북운하北運河, 거마하拒馬河 등이 있어 모두 발해로 유입되는데 조선하라는 강은 보이지 않는다.
'무경총요'에서 "조선하를 지나 90리를 가면 당도하게 되는 곳이 고북구古北口이다"라고 하였으니 조선하는 북경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고북구를 가기 전, 고북구 서쪽에서 고북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 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의 지도 상에 조선하라는 강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다행히 고북구라는 지명은 북경시 밀운현密雲縣 동북쪽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고북구 서쪽에서 고북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은 조하潮河와 백하白河이다.
백하白河는 고북구보다 밀운현 쪽에 더 가까이 있어 북경에서 단주檀州 즉 오늘의 밀운현에 당도할 때 건너는 강이다. 이를 '무경총요'에서는 백여하白璵河라고 표기하였다.
고북구에서 동쪽은 난하灤河가 있고 서쪽에서 가장 가까운 강은 조하이므로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고북구를 가고자 건너야 하는 강은 바로 조하인 것이다.
조하는 수도 북경의 중요한 상수원의 하나로서 하북성 승덕시 풍녕만족자치현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고북구를 거쳐서 밀운현으로 들어가 백하와 합류하여 조백하潮白河가 된다.
조하는 넓은 곳은 수천 미터에 달하지만 좁은 곳은 몇십 미터에 불과하다. 필자가 고북구 현지를 답사했을 때 고북구 앞을 흐르는 조하는 폭도 넓지 않고 수심도 깊지 않아서 건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무경총요'에서 "백여하白璵河를 지나서 단주檀州 즉 오늘의 밀운현에 이르고 조선하를 지나서 북쪽으로 고북구(고하구古河口)에 도달한다."라고 말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백여하가 오늘의 백하이고 조선하가 오늘의 조하를 가리킨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진다.
◆지금 북경 북쪽의 조하潮河가 조선하였다
조하는 본래 조선하였고 백하는 밝하 즉 밝달하라고 보여지는데 지금 북경시 북쪽의 조하가 조선하였다면 조선하는 언제 어떤 연유에서 조하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일까.
북송시대의 저술인 '무경총요'에서 "조선하를 건너 고북구에 당도한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송나라와 요遼나라시대에는 지금의 조하가 조선하로 불렸던 것이 확실하다.
또 원元나라 웅몽상熊夢祥의 '석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도 조선하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조선하라는 명칭은 원나라 말엽까지도 그대로 존속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청나라 때 편간된 '흠정열하지欽定熱河志'에는 조선하라는 명칭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조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명, 청시대에 이르러 조선하가 조하로 변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 조선하가 조하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일까
송나라 원나라 시대까지 조선하로 불리던 강 이름을 명, 청시기에 왜 굳이 조하로 바꾸어야 했던 것일까. 송나라와 요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고조선의 후예 고려는 그들의 행보에 따라 중원의 판도가 좌우될 만큼 강대한 나라였다.
그러나 발해유역의 주인이었던 조선은 명, 청시대에 이르러서는 압록강 이남의 손바닥만한 땅을 차지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또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이나 다름이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나라 조선이란 이름을 가진 강이 황제가 거주하는 북경 근처에 있다는 것은, 중국의 자존심에 허락하지 않는 일이고 역사적 영토분쟁을 야기 시킬 소지도 있는 불편한 사안에 해당했을 것이다.
또 한, 당 이전 중원의 중앙정부가 주로 장안낙양 등 중국의 서쪽에 있을 때는 오늘의 고북구 조하 부근이 북방 변경에 해당했지만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뒤부터는 고북구 조선하 일대는 바로 중앙정부 코앞에 있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하라는 이름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득불 다른 이름으로 변경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백 년 수천 년 써 내려오던 지명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동이와 관련된 지명을 변경시킨 사례들을 살펴보면 하루아침에 확 뜯어고치지 않고 본래 있는 글자에서 한 글자를 빼거나 보태거나, 아니면 본래의 글자에 다른 변을 첨가하거나 생략시키거나 본래의 글자와 음이 유사한 글자로 변경시키는 방법을 많이 채택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오는 조선의 조朝 자의 음을 해석하면서 "조朝의 음은 조潮이다. 직교반直驕反이다"라고 하였다. 조朝는 반절음이 직直(ㅈ) 교驕(ㅛ)로서 조潮와 동일한 음인 것이다.
조선하朝鮮河가 조하潮河가 된 것은 선鮮 자는 생략하고 조朝 자는 음이 유사한 조潮 자로 바꾸어 본래의 지명을 변경시킨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무경총요'는 어떤 책인가
조선하의 기록을 통해서 오늘의 북경이 발해조선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후세에 전해준 '무경총요'는 어떤 책인가. 북송 인종때 문신 증공량曾公亮(999∼1078)과 정도丁度(990∼1053)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4년 동안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편찬한 책이다.
북송시대 전기에는 변경 방위에 대한 수요가 컸다. 따라서 문무관원들에게 역대 군사정책과 군사이론에 대한 연구가 제창되었다. 중국 최초의 관찬 병서兵書인 '무경총요'가 북송시기에 편찬된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전집, 후집이 각각 20권으로 총 40권이다.
이 책의 저자 증공량은 북송 왕조에서 동중서문하평장사와 집현전대학사를 역임한 중신이다. 일찍이 본서 외에도 '신당서'와 '영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는 당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다른 한 사람의 저자인 정도는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에 이른 당시의 대표적인 군사가로서 이 책 이외에 '비변요람備邊要覽' '경력병록慶曆兵錄' '섬변록贍邊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무경총요'는 바로 북송 왕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와 군사가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펴낸 역작으로서 어느 정사正史에 뒤지지 않는 권위 있는 사료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조선하의 기사가 허위나 조작일 수 없다. 저들이 사실이 아닌 조선하의 기사를 조작하여 '무경총요'에 기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혹시 저자인 증공량이나 정도가 요나라의 거란족이었다면 송나라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또는 송나라 영토를 축소하기 위해서 조선하 기사를 허위로 조작해 끼워 넣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증공량과 정도는 모두 북송 사람인 데다 한족으로서, 정도는 송나라 수도 개봉시에서 태어났고 증공량은 그의 묘소가 지금도 하남성 신정시新鄭市에 보존되어 있다.
천여 년 전까지 북경시 부근에 있었던 조선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아니 우리가 내버린 발해조선이 남긴 흔적이다. '무경총요'는 지금 중국의 수도 북경이 먼 옛날 발해조선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조선하'라는 세 글자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우리 민족이 발해조선을 되찾게 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저절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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