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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호모 에스테티쿠스] <6> 막간 사색: 아름다움에 관하여

이경규 계명대 교수

아름다움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아름다움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필자는 지금까지 '미학'(aesthetics)이란 화두 아래 다섯 편의 문학작품을 고찰했다. 오감에 초점을 맞춘 선정이고 해석이었다. 미학의 어원 'aisthesis'가 원래 감각(감성)과 관련 있다고 하여 그 어의에 충실해 본 것이다. 즉 에스테틱은 '감각적 지각'을 뜻했던 바, 감각은 예나 지금이나 오감을 말한다. 오감은 모든 인간이 타고 나는 생물학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감각을 통한 지각이나 앎은 처음부터 의문시되었다. 최소한 서구에서는 그랬다. 그 선발주자인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시각과 청각도 부정확하거늘 나머지 감각은 오죽하겠냐며 감각을 통한 앎을 거부했다. 지성 혹은 이성만이 믿을 수 있는 통로였다.

18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독일의 바움가르텐이 '감성적 인식으로서의 미학'을 정초하면서 감각이 재평가된다. 그 후 미학은 복잡다단하게 발전했다. 그렇다면 감각을 통해 발흥하는 느낌 중에 가장 쾌적하고 좋은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이다. 감성 일반을 포괄하는 에스테틱이 아름다움에 관한 학으로 오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먼저 일본인들이 '美學'이라고 번역했고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 같다.

전통적으로 미학의 주된 대상을 예술로 잡은 것도 예술이 추구하는 것을 미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학이란 말은 삶의 모든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다. 누구나 미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가 그만큼 세속화되고 상업화되었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하는 오래된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담론에는 칸트가 빠지지 않는다. 그의 사유에 기대어 아름다움의 속성과 조건에 대해 한두 가지 짚어둘까 한다.

첫째, 우리가 미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감성에 기대고 있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과 방식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아주 각각은 아니다. 얼마 전에 진해 벚꽃 축제를 방문한 관광객이 400만이 넘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를테면 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이다. 꽃 외에도 많다. 그래서 칸트는 미에 대한 '공통감각'이 있다고 전제한다. 요즘은 동물도 미적 공통감각이 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둘째, 참된 미는 모든 이해득실이나 목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의 감성이다. 저녁노을이나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우리는 일체의 사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미가 소유의 대상이 되거나 특정한 목적에 동원되는 순간 변질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변질된 장미는 변질된 잡초보다 더 추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한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다. 소설 '백치'에 이 수수께끼 같은 아포리즘이 나온다. 왜 하필 '백치'인가? 세상을 구제할 이는 진리에 이른 현자도 선을 구가하는 성인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이유나 목적 같은 건 의식하지도 않는 '바보'(yurodivy)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것. 최소한 이 역설이 무목적의 목적이라는 미의 원리와 통하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이해득실의 원리를 따르는 목적론에 장악되어 있다. 아름다움도 그러하다. 아름다움이야말로 그러하다. 드디어 AI가 사람의 목적에 따라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는 시대가 왔다. 이제 휴먼은 끝장인가? 아직은 아니다. 인간의 목적에 복무하던 AI가 문득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하던 일을 멈추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다. 즐거운 끝장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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