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어느 병원 문 앞에서 홀로 버려진 채 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여자아이가 발견됐다. 곧 수술에 들어간 아이의 몸을 본 의료진은 기겁한다. 소장 대부분이 회충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일부가 괴사한 상태였기 때문.
배에서 나온 회충은 총 1천63마리, 4kg에 달했다. 양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회충을 꺼냈지만, 아이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 사건은 당시 한국에서 기생충 감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 때 인간의 몸 속에서 자연스럽게 순환되는 것이라 여겨졌던 기생충은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수치스러운 존재이자 박멸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20세기 이뤄진 한국의 기생충 박멸 사업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람이 아닌, 기생충의 흥망성쇠를 통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지은이는 기생충학과 의학 역사를 전공한 '기생충 박사' 정준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연구원이다. 이제는 '그 땐 그랬지'라는 얘기들로 정리되는 '기생충 박멸사'들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생충, 채변 봉투, 구충제에 대한 경험담들이 있을 것이다. 검진에서 기생충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교실 앞으로 불려나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충제를 먹어야 했고, 심지어 몇마리가 있는지도 공개했던 기억, 혹은 봄마다 가족끼리 모여 구충제를 챙겨먹던 기억들 말이다.
이렇듯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전국 단위 검진 및 투약 사업으로 누적 연인원 3억 명 이상, 연간 1천만 명의 사람이 동원된 결과, 오늘날 기생충 감염률은 회충 0.03%, 구충 0%, 편충 0.41% 등으로 거의 사라졌다.
전 국민이 기생충 한 마리쯤은 지니고 있던 시대에서 불과 30년 만에 기생충을 박멸하고, 이제는 제3세계 기생충 관리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우리나라 보건 의료사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지은이는 기생충 박멸사를 통해 이같은 국가적 질병 관리의 전략도 짚어낸다. 그는 '감염에 대한 수치심'이 기생충 박멸 사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정서라며, 이를 자극한 것이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었다고 얘기한다. 어쩐지 50년 전 기생충 박멸 사업에서 최근 코로나 팬데믹과의 싸움이 겹쳐보이는 책이다. 304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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