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희숙 칼럼] 대통령 욕하려 법 만드는 나라

윤희숙 전 국회의원

윤희숙 전 국회의원
윤희숙 전 국회의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법 만드는 사람들 머리에 나라 생각이 없다. 오로지 대통령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쓰게 만들어 이미지를 망치겠다는 일념만 가득하다. 법이 통과되면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걸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법 개정안을 야당이 지난 13일 다시 재의결에 부친 것도 똑같다. 거부권 국면을 길게 끌어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겠다는 의지만 번득인다.

그럼 애시당초 법 내용은 양호한가. 그럴 리가. 해마다 수십만 톤의 쌀이 남아돌아 결국은 가축 사료가 되고, 그 쌀값 보전에 보관비까지 수조 원이 투입되는 구조를 더 악화시킬 법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수십 년간의 고민 덩어리였던 쌀 초과 공급 문제를 겨우 개선해 해결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 문재인 정부이고, 그 입법의 결과가 현재의 제도라는 점이다. 쌀이든 콩이든 작물 종류와 상관없이 직불금을 지원해 농가 소득을 보전해 주면서, 쌀이 남아돌아 가격이 떨어졌을 때는 손실의 일부를 농가가 부담하도록 해 작물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서 겨우 고쳐 놓은 제도를 과거로 되돌리는 법을 발의한 야당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자기들이 주도했던 법 개정을 반성하거나 비판하는 말은 야당으로부터 전혀 나오지 않으니 결국 법 내용에 대한 관심은 한 톨도 없다는 얘기다. 나라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법을 직회부시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 후 '농민 생존권을 짓밟은 대통령'이라 비난하겠다는 정략만 있을 뿐이다.

13일 국회의장에 의해 본회의 상정이 보류된 간호법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보건의료 직역을 담고 있는 현재의 의료법 체계에서 간호사만 달랑 떼내 독자적 법을 만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한 일이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왜 이렇게 심한 갈등을 초래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간호법 내용은 본질적으로 업역 조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같은 보건의료 직역 간에 충분한 의사소통과 이해 조율이 필요할 뿐이다. 다른 의료인들로서는 신경이 곤두설 법안임에 틀림없으며, 현재 13개 보건의료 직역 단체들이 간호법 폐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향후의 갈등을 예고하는 징후다. '지역사회'를 간호법 전면에 내세운 것도 기이한 일이다. 지역사회 의료 문제는 의사나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모두가 관심을 갖고 팀 접근을 해야 할 일이니 간호법에 넣을 일이 아니라, 지역사회 의료 특별법을 만들거나 의료법 내에 지원 근거를 보완할 일이다. 한마디로 행정부로서는 이런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 혼란과 갈등이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라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법안을 숨넘어가듯 본회의에 직회부했는지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상임위와 법사위에서 충분히 다양한 의견을 들으며 조율해야 하는데 말이다. 오로지 한 가지의 이유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불가피하게 만들어 불통과 독선의 증거라 선전 선동하는 것이다. 협치를 거부하는 것은 정작 다수 의석을 내세워 앞단계 논의를 뚝 짤라 버리고 직회부시켜 버리는 야당이면서 말이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법안들이 앞으로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불법 파업을 조장하는 노란봉투법, 야당의 공영방송 장악을 영구화시킬 방송법 등이 그것이다. 이런 법이 통과되어도 막지 않는 대통령이 있다면 그것은 국정의 직무유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그것이 어떻게 비칠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적 측면의 직무유기일 것이다.

지금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심상치 않다. 수도권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경북, 부울경 지역에서마저 부정 여론이 우세한 조사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아쉬운 것은 왜 여당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쓸 수밖에 없도록 무력했는가. 그리고 거부권 행사가 국민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고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질 때까지 무엇을 했는가이다. 의석수에서 밀리는 여당의 어려움이 클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이런 법안들이 첨예한 쟁점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작년 가을부터 예측된 것도 사실이다. 다수 의석으로 아무 때나 맘껏 본회의 직회부를 할 수 있는 야당이 여론전에서까지 우세하다면 정부 여당의 지지율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 혼자서 거부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 100명이 넘는 의원이 대통령 뒤에 숨기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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