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27> 드뷔시-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르노아르 여인의 그림. 게티이미지뱅크
르노아르 여인의 그림. 게티이미지뱅크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 시인.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 시인.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1882)는 24곡으로 이루어진 드뷔시(1862-1918)의 '전주곡'(Preludes) 1권 중 제8곡이다. 프랑스 시인 르콩트 드 릴(Charles-Marie-René Leconte de Lisle·1818-1894)의 시에서 받은 인상을 피아노곡으로 만들었다. 드뷔시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감각적이고 암시적이며 시의 음악적 울림과 여운을 잘 표현한 곡이라 할 수 있다. 아마(亞麻)빛은 황갈색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소녀를 더 신비롭게 만들어 감각을 인상적으로 재현하려는 드뷔시의 시도에 잘 부합하는 제목이 되었다.

꽃이 만발한 루체른에서/ 누가 아침을 노래하는가?// 그것은 아마빛 머리카락을 한 소녀/ 체리빛의 입술을 한 아름다운 소녀// 사랑이여, 투명한 여름 햇살에/ 종달새와 함께 날아올라 노래했구나//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대상에서 느끼는 심정을 묘사한다. 선율에서 드러나는 청순하고 다정한 이미지는 작곡가의 마음에 새겨진 소녀의 모습이다. 소녀는 미묘하게 동요한다. 그녀가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거주하는 인물이거나 또는 지나간 시간 속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2분 남짓한 소품이지만 음악 속에는 소녀에 대한 애잔함이 짙게 묻어 있다.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약음 페달을 밟고 연주한다. 이 곡은 바이올린곡으로도 편곡해 많이 연주하는데 바이올린 연주에서는 약음기를 낀다. 약음기는 여리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소녀의 모습을 아련하고 신비롭게 그린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과거의 시간을 흑백으로 처리하듯이, 약음기는 소리에 얇은 막을 쳐서 소녀의 시간을 과거의 시간으로 설정한다. 그래서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 첫 프레이즈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옛날에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살았지요."

주제 선율은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다. 또 소녀가 나이 들어가며 겪었을 만한 크고 작은 풍파의 시간을 들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하모닉스 주법으로 주제 선율을 반복한다. 하모닉스는 줄을 누르지 않고 손가락을 살짝 올려 배음을 만들어내는 현악기 주법으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를 낸다. 세월이 흘러 소녀는 여인이 되었겠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드뷔시는 음악적 묘사와 서사를 통해 인상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며 긴 속눈썹과 곱슬머리의 아마빛 머리카락을 한 소녀에 대한 기억과 회상을 들려준다.

'아마및 머리카락의 소녀'는 약음기와 하모닉스 주법으로 과거의 시간과 내용을 풍요롭게 구성하고 변화시킨다. 이 곡은 관객들의 기억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옛이야기를 꺼집어 내 잔잔한 추억의 시간을 만든다.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하나의 악기를 지니고 있다. 이 악기를 심금(心琴)이라고 하는데 이따금 이 악기가 울리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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