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북인물사] (4)영남의 독립운동가 육우당 형제들

형제애·애국 충절 똘똘…영남 최고의 독립운동家

안동 도산면 원천리에 있던 육우당 생가.
안동 도산면 원천리에 있던 육우당 생가.

◆독립운동의 성지 '대구경북'

1910년 8월, 일본제국에 대한제국이 강제로 합병당한 후 일제 치하에서 우리 국민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서도 독립의 열망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사망했을 때는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반일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영남지역의 항일운동은 유독 거셌다. 영남의 독립운동가는 3천870명으로 전국 1만7천644명의 22%에 달했다.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지역이었고 역사 속에 묻힌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에 저항했다.

이들 가운데 '육우당'에서 태어난 민족 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6형제는 단연 우뚝하다. 애국지사 이원기, 순국시인 이육사, 서예가 이원일, 문학평론가 이원조, 언론인 이원창, 화가 이원홍 등 여섯 형제다. 형우제공(兄友弟恭: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함)의 표상이며 선비정신의 표상으로도 손색없는 인물들이다. 육우당은 육형제의 우애를 기려 지어진 당호(堂號)이다.

육형제는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부친 이가호와 모친 허길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두 조부 치헌공 이중직에게 한학을 배웠다.

허씨 부인.
허씨 부인.

모친은 선산의 범산 허형의 자녀로 왕산 허위 선생 집안 출신이다.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열렬했던 집안이다. 친가 외가 모두 애국충절의 가문인 셈이다.

집안 전체가 창씨개명 거절과 신사 참배 거부 등으로 고초를 겪었다. 위로 삼형제(원기·원록·원일)가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와 군정서(軍政署), 의열단(義烈團) 활동에 가담했다는 '기려수필'의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의 항일운동은 그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항일운동의 서막

"펑! 펑! 펑!" 1927년 10월 18일 낮 대구시내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앞에 도착한 벌꿀 상자 3개가 터진 것이다. 벌꿀 상자 제작자는 칠곡 출신 장진홍 의사였다.

일제의 고관 암살과 구국방략에 대해 고민하던 장 의사는 중국에서 폭탄 제조기술을 배워 와 폭탄 4개를 숙박하던 여관 종업원에게 벌꿀 상자라고 속여 공격 목표로 삼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청, 경상북도경찰부 4곳에 배달을 요청했다.

이원기
이원기

그러나 먼저 배달된 조선은행 대구지점 상자에서 화약 냄새를 맡은 일본인 은행원이 도화선을 자르고 절단하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길 옆에 임시로 놓아 두었던 폭탄이 연달아 폭발하는 바람에 경찰과 행인 등 여러 명이 중경상을 입고 은행 유리창이 파손되었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일경은 전국적으로 비상경계망을 펼쳤다. 그러나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1928년 1월 16일 평소 예의주시하던 이원기(육우당 맏형, 당시 29세), 2남 이원록(육사, 24세), 3남 이원일(22세), 4남 이원조(19세) 등 4형제를 잡아들였다.

이원록(이육사)
이원록(이육사)

일주일 만에 모두 석방되었지만 3일 만에 위로 3형제(원기, 원록, 원일)는 재검거됐다. 악독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 진범으로 꾸며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했다. 이들을 취조한 한국인 형사는 이원기를 지휘자로, 이원록을 폭탄 운반자로, 이원일을 폭탄 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려고 삼형제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다.

◆'나를 고문하라' 눈물겨운 형제애

달구어진 쇠꼬챙이로 불지짐을 하고, 거꾸로 매달아 고춧물을 코 안으로 넣고, 의자를 포개서 그 위에 올라가게 하여 밑의 의자를 빼 떨어져 뒹굴게 하는 등 온갖 참혹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을 당할 때에도 삼형제가 서로 "나를 고문하라"고 대들어 일본 순사들이 형제간 우애에 놀라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불굴의 저항에 고초는 더욱 심해졌다.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벽지를 헐고 기왓장까지 뒤집었으니 일제의 만행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원일
이원일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1929년 집행원부에 기록된 사건진행번호 334번 이원기의 죄명은 폭발물취급규칙,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치안유지법 위반, 협박, 살인미수이며 이원록(134번), 이원일(135번)도 죄명은 같았다.

이 사건의 주역인 장진홍은 1929년 2월 13일 검거됐지만 삼형제는 바로 석방되지 않았다. 이원록과 이원일은 미결수로 1929년 5월 4일, 이원기는 1929년 10월 31일 보석으로 출감할 수 있었다. 모두 고문 후유증으로 성한 몸이 아니었다.

이원록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 또다시 검거되었다가 풀려나왔다.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 지도와 지하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 11월 어느 날 새벽, 대구의 거리 전신주에 배일 격문이 붙고 뿌려진 소위 격문사건이 발생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터진 이 격문사건에 이원기, 이원록, 이원일 삼형제는 또 혐의를 받아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아끼는 동생들이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을 때 같은 길을 걸었던 맏형 원기의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동생 원록과 원일의 뒷바라지와 안녕을 염려하고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은 그가 남긴 행적 곳곳에 남아 있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아버지 같은 형이었다.

이원조
이원조

◆'기록 없으면 탈락'…외면받는 독립운동

이원조 또한 학생 때 위로 형님 세 분과 함께 투옥된 적이 있었고, 동경 유학시절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1931년 동경법정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이원조는 위당 정인보가 장안 삼재(三才)의 1인으로 총명함과 재능을 평가하였다고 한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던 인문주의자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도 이원조의 총명함에 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90년 그의 장조카 이동영 부산대 국문과 교수가 '이원조 문학평론집'을 출간하였고, 2003년 모교인 대구 대륜중·고등학교에 이원조 문학비가 건립됐다.

이원창
이원창

이원창은 언론인으로 조선일보 인천지사 기자를 지내다 광복 후 조선중앙일보 정경부장·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후일 죽산 조봉암의 비서를 역임하였고 진보당 해산 후 이승만 정권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지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원홍은 화가로 1936년 조선미전에 입선한 후 축하연에서 넘어져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19세였다.

이원홍
이원홍

원기, 원록 두 형과 함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자신을 희생했던 셋째 이원일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육형제의 장손자 이승환(전 경산시 경제국장) 씨는 이원일의 독립운동 기록(형사사건부·수형인명부·판결문 등)을 국가기록원에서 확인하여 2021년 4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요청하였으나 '사망 사실 등 행적 불분명'이란 사유로 불가 통보를 받았다.

광복 후 반민족 처벌을 주장하다가 친일에 쫓기어 월북했다가 6·25 때 남쪽으로 왔으나 행방불명이 됐다. 그럼에도 '유족이 확인할 수 없는 사망 사실 자료를 제출하면 다시 심의할 수 있다'는 보훈처의 황당한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1969년 퇴계 선생을 참배하기 위해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을 안내하는 이동영(맨 왼쪽) 교수.
1969년 퇴계 선생을 참배하기 위해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을 안내하는 이동영(맨 왼쪽) 교수.

이승환 전 국장은 "이러한 조사는 국가보훈처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 '그냥 죄송하다'고 하는 실무자의 답변뿐이라 후손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했다.

그는 지난 1월 27일 매일신문에 보도된 '콘텐츠 부족한 문학관' 제목의 문화기념관 개관에 즈음한 우려 기사를 보고 유족 입장에서 대구 중구에 있는 이육사 선생 옛 집터 인근에 건립된 이육사기념관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옛 주소가 대구 남산정 662-35번지 일대로 한때 육형제가 함께 거주했던 곳이다. 여섯 분의 자료를 모아 기념하고 공유하는 교육의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육우당 형제 프로필

◆이원기(1899~1942): 건국훈장 애국장, 1927년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으로 1년 9개월 투옥, 1930년 대구격문사건으로 검거, 진주에서 독립자금 마련으로 기묘명현록 중간.

◆이원록(이육사·1904~1944): 건국훈장 애국장, 문화훈장 금관장, 민족시인, 조선일보 기자,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17회 구금 및 투옥.

◆이원일(1906~?): 서예가, 1927년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으로 1년 4개월 투옥, 1930년 대구격문사건으로 투옥.

◆이원조(1909~1955):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기자, 1990년 이원조 문학평론집 '오늘의 문학과 문학의 오늘' 출간.

◆이원창(1914~?): 조선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 죽산 조봉암 선생 비서 역임.

◆이원홍(1918~1936): 화가, 1936년 조선미전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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