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1870년 근대적 통일 이전까지 오랫동안 분열된 나라답게 지역 간 차이가 심하다. 베트남처럼 기다란 반도 지형이나 지역 간 경제력 격차도 촉매제로 작용했다. 다만 문화적 요소인 가톨릭과 오페라, 에스프레소와 피자, 축구와 F1 등은 통합의 상징이다.
건국 초기 공화정 로마는 지중해를 무대로 성장했다. 로마의 세력권이 팽창하자 시칠리아섬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해상왕국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양국의 명장인 한니발과 막시무스가 활약한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내우외환을 극복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팍스 로마나를 구가했다.
하지만 제국의 모순과 게르만의 남하로 로마의 영광을 상실했다. 중세를 거치며 아비뇽의 유수를 극복하고 르네상스라는 빛도 찾아왔지만 지리상의 발견 이후 이베리아를 경유해 대서양으로 넘어가는 패권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로마의 몰락 이후 이탈리아 남부는 외침에 시달리며 요새도시로 진화했다. 풍광이 아름다운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앞세워 관광에 투자했지만 남유럽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삼부카 마을의 1유로 하우스처럼 남부의 시골은 한국처럼 지방소멸이 진행중이다. 반면 반도의 북부는 합스부르크의 통치를 받으며 근대화 역량을 배양했다. 대도시들은 유벤투스나 AC밀란을 앞세운 스포츠 마케팅도 활발하다.
전후 이탈리아는 제조업 기반이 공고한 북서부 지역의 별칭인 제3의 이탈리아를 앞세워 도약했다. 자동차, 패션, 관광 등을 부양한 중소기업의 창의성과 협동조합의 연계망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미국식 포디즘에 기원한 대량생산체제와 구별되는 유연생산체제가 이탈리아 북부의 성공비결이다.
이탈리아 전역은 로마의 유산과 예술의 감동이 혼합된 꿈의 여행지로 알려져 있다. 산업화 이전 마차 시대에 그랜드 투어에 동참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문이 대표적이다. 근자에는 농촌관광을 선도하는 부티크호텔과 지역에 특화한 예술축제가 방문객을 유혹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중부와 북부를 대표하는 도시인 피렌체와 밀라노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피렌체의 전경은 중세의 흔적을 공유하는 경주나 교토의 분위기와 유사하다. 노을빛 풍광이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고 도심지 한복판에 우뚝 솟은 두오모 성당은 이정표 역할을 한다. 활력이 넘치는 산업도시 밀라노 장면에서는 시그니처인 주홍색 트램이 정겹다. 스포르체스코성에는 중세의 시민봉기와 경세가 다빈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준세이는 피렌체 공방에서 유화 복원사 과정을 이수중이다. 멘토인 조반나 선생의 추천으로 400년 세월을 보내며 흐릿해진 치골리의 작품 복원을 수행하던 와중에 헤어진 연인 아오이를 만나기 위해 밀라노에 간다. 그는 애인과의 화해에 실패하고 작품 훼손사건으로 공방까지 문을 닫자 고국으로 귀환한다. 준세이는 그녀와의 인연을 정리하면서 서른 살 생일에 연인의 성지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떠올린다. 이후 역사도시 피렌체와 산업도시 밀라노를 오가는 재결합 스토리가 펼쳐진다.
피렌체는 1966년 아르노강 대홍수로 문화유산이 훼손되자 복원공방과 관광산업에 의존하는 과거형 도시로 각인되었다. 오래전 필자도 이탈리아를 종단하는 배낭여행으로 피렌체를 방문해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두오모 쿠폴라를 비롯해 베키오다리와 시뇨리아광장, 중앙시장과 미켈란젤로언덕 등을 누비며 메디치가 후원한 천재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정보와 시간이 부족한 초보 여행자라 이해는 얇았지만 감동은 풍부했다.
코로나 직전에는 이탈리아 북부 횡단에 도전했다. 류블랴나에서 베네치아로 오는 길은 험난했다. 도로망 개설이 제한된 상태에서 철도망 투자도 빈약했다. 고속도로를 우회하는 접경지 국도는 2차선에 불과했다. 교통난 해소를 위해 발칸을 포함한 연합체의 창설이 요구된다.
요즘은 오버투어리즘으로 시민불만이 고조된 베네치아지만 석호와 갯벌이 합작한 100여개의 섬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본섬에 인접한 무라노섬은 전유럽을 매혹시킨 유리공예의 흔적도 남아 있다.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마르코 광장에서 일몰을 감상하고 아침에 리알토 다리 가판에서 지중해 참치를 맛보는 일도 색다른 체험이다.
베네치아발 밀라노행 열차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단서를 품은 베로나를 경유한다. 여유가 있는 여행자라면 굴곡진 강변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근대의 건축물과 어우러진 시티투어에 도전해도 유용하다. 이곳은 글래디에이터의 무대였던 원형극장을 오페라 축제의 무대로 재활용하고 줄리엣의 집을 스토리텔링해 명소로 만들 정도로 창의적이다.
밀라노로 진입하는 기차에서 도시개발의 열기를 목격했다. 미술관으로 변신한 파리의 오르세역처럼 밀라노역의 반원형 외관도 인상적이다. 1980년대 이후 제조업이 약화되자 패션과 관광의 비중이 증가했다. 섬유산업의 쇠퇴를 만회하기 위해 대구가 밀라노를 차용했을 정도로 정체성이 분명한 곳이다.
제노바는 베네치아의 라이벌 항구도시이다. 원나라에서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제노바의 포로가 되면서 <동방견문록>을 출간했다. 통일운동과 올림픽으로 알려진 토리노는 1982년 옥상에 테스트 트랙을 갖춘 피아트 공장이 문을 닫자 호텔과 컨벤션으로 재창조했다. 국내에서는 연초제조창을 문화제조창으로 재생한 청주시가 유사한 사례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재창조는 제조업 위기론이 부상한 영남권 산업도시가 정면교사해야 한다. 반면교사 대상인 이탈리아 남부에도 창의적인 도시재생 사례들이 다수 존재한다. 결국 우리 지역과 도시도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혼합된 탄탄한 산업구조를 창출해야 글로컬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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