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47년 정월 초 상대등 '비담'은 화백회의를 소집해서 여왕의 폐위를 결정했다. 비담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명활성'에 미리 대기시켜 둔 군사를 곧바로 궁성 '월성'(月城)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시각이 늦어 여왕의 거소인 월성으로 향하는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담과 화백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초조하게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자객은 실패한 모양입니다. 소식이 없습니다." 화백회의 개최 전에 미리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보낸 자객들의 암살시도가 실패했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후 상대등에 기용된 이찬 '알천'의 공이 컸다. 선덕여왕과 김유신·김춘추 등 친위세력은 일찌감치 비담이 주도해 온 귀족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왕성을 수비하던 수비대를 강화하는 등 비담의 쿠데타에 대비해왔다. 압량주(경산)에 주둔하고 있던 김유신은 비담의 움직임을 미리 간파, 하루 전 월성에 들어가서 단단하게 방비를 마친 뒤였다.
◆비담의 난, 역사의 분기점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된 '비담의 난'은 신라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에서 신라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비담의 난이 발발되자 선덕여왕은 갑자기 승하(昇遐)했고 진덕여왕으로 왕권이 계승되면서 '여왕의 시대'는 7년여 더 이어졌다. 고구려와 백제 및 당(唐)과 왜(倭) 등의 각축 등 숨막히는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존립을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그 때까지 수면아래에 감춰져 왔던 '김춘추-김유신 동맹'의 권력 장악 전략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했다. 아들 없는 진평왕의 유언대로 화백회의가 추대해 여왕에 즉위한 선덕여왕이 결국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는 위기에 처했다. 비담측의 섣부른 공세는 오히려 김춘추·김유신의 반격으로 왕권이 강화되는 동시에 화백회의를 무력화시키는 동력이 됐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여왕의 시대를 연장하고 이어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으로 등극시키는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춘추를 내세운 신라의 대당외교를 통한 나당연합 성사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는 당나라의 책략까지 물리치는 과정에서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없었다면 신라가 역사서에 존재하지 않게 됐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왜(倭)의 한반도 침략을 막아낸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대접하면서도 삼국통일의 초석을 깔아놓으면서 통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김유신은 잊어버린 것 같다. 김유신을 그저 신라의 한 장군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신라는 지독한 계급사회였다. 골품제를 지키고자 성골과 진골 등 왕족끼리도 후대에 이르면서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의 왕권다툼을 벌이게 되고 혈통을 보전하고자 '근친혼'이 일상인 사회였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증손자로. 금관가야 왕족의 직계인 '진골' 이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진골과도 신분차이가 있었다. 뛰어난 무공을 바탕으로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지만 골품제의 벽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는 4년 만에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의 인연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 것 같다. 김춘추 역시 왕권과 멀어지면서 몰락한 '진골'가문의 분루를 감추면서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김유신은 살아서는 왕으로 추대되지 않았지만 경주에 있는 그의 묘는 왕릉에 준하는 양식으로 웅장하게 조성돼 있다.
진평왕의 시대에 태어나 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무열왕대에는 무공을 바탕으로 '상장군'으로서 신라군을 총지휘하면서 삼국통일을 이끈 주역중의 주역으로 활약했지만 왕으로 추존된 것은 사후 100여년이 지나서였다.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 시대에 김유신이 없었더라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꿈은 허망하게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연대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격파하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더라도 즉시 당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한반도의 모습도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역사를 기록하고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삼국사기는 여러 권에 걸쳐 김유신에 대해 기록했다. 총 50권의 열전 중 10권이 인물열전인데 그 중 3권을 따로 떼어 김유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김부식이 보기에도 김유신장군이 당대역사의 귀감이 되는 영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리라.
"신라에서 유신을 대하는 것을 보면 친근하게 하여 틈이 없도록 하였고 일을 맡겨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며, 계책을 내면 행하고 말하면 들어주어 하여금 쓰이지 않는다고 원망을 품지 않게 하였으니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으로 그 뜻한 것을 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과 함께 협력하고 모의하여 세 나라의 영토를 합쳐 한 집안을 이루고 능히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유신은 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사대부들이 아는 것은 물론이고 꼴 베고 소치는 아이까지도 그를 알고 있으니, 그의 사람됨에 반드시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사기에서의 유신에 대한 역가적 평가는 넉넉했다.
당과 동맹을 맺어 백제에 이어 고구려 공략에 나선 후 당군이 엄동설한에 신라에 군량보급을 요청하자 노구의 김유신은 직접 군량를 어깨에 매고 앞장서는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고구려에 사신으로 간 김춘추가 인질로 잡혀 돌아오지 않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고 그때서야 고구려가 김춘추를 풀어주기도 했다.
김유신이 사후 162년이 지난 뒤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것은 신라말기 상황과 오버랩된다. 천년제국의 국운이 쇠해지자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의 기상을 이어받겠다는 흥덕왕(42대)의 정치적 포석이었다. 신라를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 역사에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은 김유신이 유일하다.
◆선덕여왕·진덕여왕·무열왕시대까지 이어져
선덕여왕의 시대 '향기로운 여왕의 절' 분황사(芬皇寺)를 세우고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건축한 데 이어 첨성대를 축조해서 여왕의 권위를 높인 것 역시 선덕여왕 치세에 대한 김유신의 세심한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덕여왕은 그러나 비담이 귀족들을 부추겨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떴다. 그러자 김춘추-김유신은 비담이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운 '여왕은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기치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수를 내놓았다.
선덕여왕의 사촌동생 승만(勝曼)을 후계자로 내세워 여왕의 장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진덕여왕을 즉위시켰다. 전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선덕이 죽고 진덕이 즉위하면서 여왕의 시대가 이어진 것은 쿠데타의 명분을 약화시키면서 반란세력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충격요법이었다. 결국 '비담의 난'은 김유신과 김춘추의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신라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진덕여왕이 죽자 화백회의는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알천은 김유신과 상의한 끝에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역사는 왕권을 양보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진덕여왕의 시대가 사실상 김춘추-김유신의 섭정시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후계자를 결정하는 화백회의의 결정마저도 뒤집을 정도로 김유신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춘추는 김유신을 위해 대각간보다 높은 '태대각간'이라는 최고위직을 만들어 김유신의 공로에 보답했다. '화랑'으로 의기투합해서 처남매부지간에 이어 장인사위지간으로 맺은 유신과 춘추 두 청춘이 만들어낸 역사가 삼국통일이자 통일신라였다.
오릉의 오른쪽 건너편 논 한가운데에 석재와 기와조각들이 나뒹구는 빈터가 있다. 천관사(天官寺)가 있던 곳이다. 김유신이 젊은 시절 '천관녀'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나 모친의 꾸중으로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러나 술에 취한 그를 태운 말(馬)이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자 말의 목을 쳤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장군과 천관녀 사이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삼층석탑과 잡초가 무성한 절터로 남아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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