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 (8)

조선하 존재, 왕기공행정록·석진지에도 있다
조선하를 조리하로 바꾼 것은 中 한족들이 의도적으로 오기
북경 북쪽에 있었다는 사실 꺼려 원래 글자 획 바꿔 한국사 왜곡
위만이 조선 올 때 건너온 패수, 조선국 서쪽 조선하일 가능성 커

왕기공행정록의 저자 왕증 동상.
왕기공행정록의 저자 왕증 동상.

◆북경의 조선하는 '왕기공행정록王沂公行程錄'에도 나온다

북송 왕조의 문신 왕증王曾(978∼1038)은 거란족 요遼나라 국왕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장으로 임명되어 1012년 요나라의 서울 중경中京을 방문했다. 귀국 후에 왕증은 북송의 진종황제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귀국 보고서 형식인 한 편의 주소奏疏를 올렸는데 이를 '상거란사上契丹事', 또는 '왕증상거란사王曾上契丹事'라 한다. 거란의 일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는 뜻이다.

상소의 내용은 왕증이 송나라의 특사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송나라 변경 웅주雄州(지금의 하북성 웅현)에서 요나라 수도 중경 즉 오늘의 내몽고 영성현寧城縣에 당도하기까지의 중간 경유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일정표 형식으로 적은 것인데 그가 기국공沂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인들이 이를 '왕기공행정록王沂公行程錄'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신 축하사절로 송나라 수도 개봉을 떠나 요나라를 다녀오면서 연도의 이정里程, 역관, 민속과 연경, 중경의 제도 및 거란의 지리 등을 상세히 기술한 '왕기공행정록'은 그 성격 면에서 한양조선의 박지원이 건륭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그것을 일기로 남긴 '열하일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우리가 천여 년 전에 북경시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조선하가 '무경총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쓰여진 '왕기공행정록'에도 다음과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조리하 (칠도하라고도 한다)를 지나서 90리를 가면 고북구에 도착한다.(過朝鯉河 亦名七度河 九十里 至古北口)"
'왕기공행정록'의 내용은 '무경총요'의 기록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다만 조선하朝鮮河를 조리하朝鯉河라 하고, 그것을 일명 칠도하七度河라고도 부른다는 설명을 추가하고 있는 점이 약간 다르다.

'무경총요'에서 "조선하를 지나서 90리를 가면 고북구에 당도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조선하朝鮮河와 조리하朝鯉河는 동일한 지명이 분명하고 조리朝鯉라는 명칭은 다른 기록에는 없는 즉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는 용어라는 점에서 조리朝鯉는 조선朝鮮의 오기인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조리하朝鯉河는 조선하朝鮮河가 북경 북쪽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족들이 이를 숨기기 위해 선鮮자를 글자 모양이 비슷한 이鯉자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라고 여긴다. 만일 '무경총요'를 아울러 참고하지 않고 '왕기공행정록'만을 읽는다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 갈 수 있다.

'무경총요'는 황제의 명으로 편찬한 책이어서 후세에 함부로 글자를 바꿀수 없었지만 '왕기공행정록'의 경우는 개인적인 저작이라서 후인들에 의한 자의적인 수개가 가능했다고 본다.

'산해경'에서 "발해의 모퉁이에 조선이 있다"라고 말했으니 조선하가 발해의 북쪽 북경지역에 있었던 것은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조리朝鯉'라는 지명은 동양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한족 민족주의자에 의한 조선하의 의도적인 오기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조선하를 조리하로 바꾼 것은 중국의 한족들이 한국사를 왜곡할 때 어떤 방법을 동원하는지 그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원래의 글자에서 획을 빼거나 보태는 방식으로 변경하여 역사의 진상을 은폐하는 것이 저들이 사용하는 가장 상투적인 수법이다.

요나라 중경성 유적, 요나라 황제가 이곳에 머물며 송나라 사신을 접견했는데 지금은 궁전은 간데없고 빈터만 남아 있다
요나라 중경성 유적, 요나라 황제가 이곳에 머물며 송나라 사신을 접견했는데 지금은 궁전은 간데없고 빈터만 남아 있다

◆'왕기공행정록'의 저자 왕증은 어떤 인물인가.

왕증은 송나라 천주泉州 사람으로 진종真宗 함평咸平 5년(1002) 향시鄉試 회시會試 정시廷試에서 모두 장원壯元을 하였다. 과거제도를 시행한 지 1,300년 간 연이어 삼장원三壯元을 모두 차지한 경우는 17명뿐이라고 하는데 왕증이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율곡 이이李珥가 과거시험에서 삼장원을 모두 차지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그래서 율곡 이이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한양왕조 500년의 최고 천재로 손꼽는데 왕증 또한 그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왕증은 송나라에서 직사관直史館 사관수찬史館修撰 같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역사편찬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벼슬은 나중에 군사기구의 최고 장관격인 추밀사樞密使에 올랐고 재상을 두 차례나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국공沂國公에 봉해졌다.
왕증과 같은 비중 있는 인물이 "조선하의 별칭이 칠도하七度河이며 이를 건너서 고북구에 당도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조선하가 송나라때까지 북경 북쪽에 실재했다는 것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원元나라 때의 저술 '석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도 조선하가 보인다.

원나라때 웅몽상이 지은 북경에 대한 지리서, 석진지집일.
원나라때 웅몽상이 지은 북경에 대한 지리서, 석진지집일.

'무경총요'나 '왕기공행정록'보다 시기는 좀 뒤지지만 조선하에 대한 기록은 '석진지析津志'에도 보인다. 요나라와 금나라 때는 지금의 북경을 연경燕京 석진부析津府라고 호칭했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의하면 "석목析木을 진津이라 한다.(析木謂之津)"라고 하였다. 석목은 하늘의 별자리 이름인데 지상의 연燕나라 분야가 하늘의 12별자리 중 석목에 해당한 데서 이런 별칭을 사용했다.

'석진지'는 원나라 말엽의 학자 웅몽상熊夢翔(1285~1376)이 원나라 대도大都와 금나라 중도中都 즉 오늘 북경의 연혁, 명승고적, 인물, 산천 풍물, 세시풍속 등에 대해 기술한 책으로 모두 34책이었다고 전한다.
다만 애석하게도 북경의 역사를 기록한 '석진지'는 현재 원본은 이미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북경도서관에서 1983년 '영락대전' 등의 여러 고서적 가운데서 '석진지' 관련 기록들을 수집 정리하여 '석진지집일'이라는 이름으로 펴냈으며 따라서 내용상에 다소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까지 발견된 저작 중에서는 최초의 북경 관련 전문 지방사지地方史志로 평가받고 있다. 명明나라 초기에 편찬된 '북평도경지서北平圖經志書'나 '순천부지順天府志' 등은 모두 '석진지'에서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북경의 역사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최초의 북경 지방사지인 '석진지집일'에 조선하가 등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원나라때까지는 조선하라는 이름이 전해져온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만衛滿이 건너서 왔다는 패수浿水는 이 조선하였을 것이다

'산해경'에 "발해의 모퉁이에 고조선이 있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무경총요'에서도 "순임금이 유주를 설치했는데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舜置幽州 東有朝鮮遼東)"라고 말했다.

유주幽州는 북경을 가리키고 유주의 동쪽은 북경의 동쪽을 말함으로 이 기록에도 이미 오늘날 북경의 동쪽에 조선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는 셈이다.
고조선이 북경 동쪽에 있었다면 조선하는 아마도 조선국의 도성 서쪽을 흐르는 강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은 이를 조하, 백하로 나누어 부르지만 당시에는 조선하 또는 밝달하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한국 반도사학의 주장에 따라 청천강을 패수라고 표기한 중국지도.
한국 반도사학의 주장에 따라 청천강을 패수라고 표기한 중국지도.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나오는 한나라의 사신 섭하涉何가 건너서 온 강도 이 강일 것이고 위만衛滿이 건너서 왔다는 강 또한 이 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조선으로 올때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는 반도사학의 주장처럼 북한에 있는 청천강이 아니라 바로 중국 북경의 조하潮河 또는 백하白河라고 여겨진다.
발음상으로 볼 때 패浿는 백白과 가깝다. 중국 발음으로 패浿는 페이(pèi), 백白은 바이(bái)로 발음한다. 중국인들이 우리말을 기록하는 것을 보면 전북 화순을 화삼華森, 경기도 화성을 화송華松, 전북 고창을 고창高昌이라고 표기한다.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가져다 쓴다.

패수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하는 과정에서 바이(白)와 발음이 비슷한 패자를 사용하여 패수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섭하와 위만이 조선으로 올 때 건너온 패수는 당시의 밝달하, 조선하 현재의 백하, 조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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