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국회의원의 역사 발언이 논란이다. '김구 선생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북한의 대남 전략 전술을 아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극우적 역사관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전복하려는 목적"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당 지도부조차 "역사 논란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했다. 그런데 과연 역사적 '사실'(fact)은 무엇인지, 논의가 빠져 있다.
사실은 이렇다. 일제의 패망 후 38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이 진주했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소련과 협력해 전후 평화 체제를 구축할 걸로 낙관했다. 그래서 소련군이 동유럽과 한반도에 진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결의'를 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민족 진영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공산 진영은 찬성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독립정부 수립을 논의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유엔에 한국 독립 문제를 상정한 것은 미국의 고육책이었다. 그 결과 1948년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김구 선생도 해방 이후 철저한 반공 노선을 고수했다.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은 1920년대 이후 정치 노선을 놓고 대립했다. 민족이 우선인가, 계급이 우선인가의 문제였다. 김좌진 장군은 공산당원 박상실에게 암살되었다. 김구도 공산 계열 인물의 권총 저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공산 진영이 찬탁을 표명하자, 임정 조직원들은 김일성 등을 암살하려고 수류탄을 투척했다. 두 진영의 투쟁은 결사적이었다.
김구의 정치 노선은 늘 단호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5·10 총선거에 대한 입장은 크게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남한만의 총선거에 의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하지만 1948년 1월 6일, 돌연 "미소 양군 철퇴와 한인의 자주적 민주적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소련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반공 노선에서 돌아선 것이다. 명분은 통일정부였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남북 정치지도자 간 정치협상회의를 요구했다. 김일성은 처음에 "김구를 만나 보았자 아무런 수확이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소련 군정의 지도에 따라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 독립을 위한 전 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평양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이미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던진 몸이니 나의 가는 길을 막지 말라" "내가 이번에 가서 성과가 없다면 차라리 38선에서 배를 가르리라"라는 비장한 성명을 내고 북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평양 회의는 끔찍했다. 회의 진행은 물론 성명서, 결의문에 전혀 김구의 의견을 반영시킬 수 없었다. 통일을 위한 정치 회담도 없었다. 회의는 철저하게 레베데프, 쉬띄꼬프 등 소련의 지도하에 진행되었다.('레베데프 비망록')
결과만 놓고 보면, 김구는 철저히 이용만 당했다. 남로당의 마지막 지하 총책인 박갑동에 따르면 스탈린은 처음부터 북한도 동유럽처럼 만들고자 했다.('통곡의 언덕에서') 실제로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이 위원장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되어 '우리 정부'라고 불렀다.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김구의 북행은 이미 북한에 단독정부가 확립된 뒤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김일성에게 분단의 책임을 이승만 등에게 전가하는 빌미만 주었다. 김구는 5·10 선거도 보이콧하고,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부정했다. 미군 철수도 계속 주장했다. 2년 뒤 6·25전쟁이 일어났다.
김구는 불멸의 애국자다. 하지만 1948년 이후의 정치적 행보는 민족주의의 이상에 치우쳐 냉엄한 정치 현실을 간과했다. '민족'이 '체제'에 앞선다고 생각하고, 국가의 운명이 달린 안보조차 잘못 인식했다. 미군이 완전히 떠났다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길은 대한민국의 정로(正路)와 어긋났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 죽음은 한국 민족주의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민족주의의 심벌로 부활했다. 하지만, 그 결과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가 한층 어려워졌다. 냉엄한 정치 현실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성찰하는 균형감각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의 민족사가 반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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