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국가건설과정에 있어 절대 배격해야 할 야만적인 테러 행위가 최근 경기 각지에서 빈발하여 전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으며 당국에서도 이를 엄중 취체하고 있는 이때 작 2일 시내 동업 민성일보사와 신라공보사의 각 공장 인쇄소 급 근민당 사무소에 불법 테러단이 습격하여 인쇄시설을 파괴하는 동시 공장원을 난타 중상을 입게 한 불상사가 일어나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2월 4일 자)
1947년 12월 2일 해가 지자마자 한 신문사에 10여 명의 괴청년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인쇄시설 전부를 파괴하고 직원을 곤봉으로 난타하고 도주했다. 이 같은 테러로 직원 7명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테러당한 신문사는 민성일보였다. 비슷한 시각인 6시경에는 신라공보사 위탁공장인 동성로 대동인쇄소에 테러단 수십 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공장인쇄시설을 파괴했고 인쇄소 간판과 신문사 현판을 탈취했다. 남선경제신문은 직원이 다치고 인쇄시설이 파괴된 민성일보 등의 피습을 비교적 큰 기사로 다뤘다. 왜 그랬을까.
테러는 일찍이 망국의 길로 지적받았다. 그런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테러는 극성을 부렸다. 정치적 대립과 이념의 갈등은 테러로 표출됐다. 언론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진보나 좌익으로 분류된 신문들은 극우주의자 등이 주도하는 백색테러의 주요 타킷 이었다. 신문사를 향한 테러는 기자들에게도 신변 위협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처럼 바이라인에 실명 대신 K기자, Y기자 식의 필명을 쓰는 이유였다.
신문사 테러에는 특정 세력과 연관된 경우가 허다했다. 1947년 3월에 있었던 민성일보 테러는 이런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테러에 가담했던 한 청년이 보름 뒤 경찰에 자수했다. 특정 정당의 청년부 당원이었던 이 청년은 테러에 자주 동원되었다. 신문사 습격 후에도 줄줄이 테러 일정이 잡혔다. 청년은 정당의 역할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급기야 양심의 가책을 느껴 경찰에 자수했다. 청년은 테러의 모의와 실행에 이르게 된 과정을 밝혔다. 이런 상황에도 당국의 수사는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1947년 3월에는 한 신문사의 기자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돌연 테러단과 동일한 경관 3명이 기자에게 폭행과 난타'를 했다는 헤드라인 등으로 신문에 보도됐다. 경찰의 기자 폭행은 테러와 유사하다는 시각이 반영됐다. 경찰의 기자 폭행은 권력이 저지른 테러와 다를 바 없다는 의구심이었다. 언론인들은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 행했던 일제 순사의 탄압을 떠올렸다.
'부내 서문로에 있는 동업 민성일보사에서는 전반 일선기자의 구속사건에 뒤이어 여수 사건이 발생한 이후 임시휴간 중 지난 9일 재발간하기 위해 공무국 관계 직원 수명이 출근하여 활자 정돈 중 동일 오전 10시 30분경 부내 모 청년단원 10수 명이 동사 옥내에 있는 인쇄시설 기타 집기 등을 파괴하였다는데 동 사건에 대해 대구서장은 기자단 질문에 금명간 그 진상을 조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11일 자)
1948년 11월 초에도 민성일보 공장은 테러 공격을 당했다. 신문사로 몰려온 괴청년들은 인쇄시설과 집기를 파괴했다. 걸핏하면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947년 3월 하순에도 공장이 피습되어 신문발행을 일주일이나 못했다. 두 달 뒤인 6월 하순에는 괴한의 습격으로 어렵게 복구했던 인쇄시설이 망가졌다. 신문사의 수난은 신문발행의 중단에 그치지 않았다.
해방 후 대구지역의 신문들은 식량난 대응의 실패에서 보듯 미군정의 정책에 불신이 컸다. 민성일보는 미군정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더 셌다. 미군정으로부터 지원받는 정치세력에도 비판적이었다. 기사의 논조와 정치적 지향성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기자나 편집국장 등의 피검도 잦았다. 대구 10월항쟁 직후에도 기자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는 미군정과의 대립적인 구도가 영향을 미쳤다.
민성일보는 해방 한 달만인 1945년 9월에 대구서 가장 먼저 창간했다. 백성의 소리를 듣겠다며 민성(民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간 때부터 교사, 의사, 청년 등 전문직과 청년들의 구독‧후원이 많았다. 신문은 일제 잔재 및 친일 세력의 청산과 남북 분단의 책임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러다 보니 좌우의 대립 과정에서 걸핏하면 테러 공격을 당했다. 잦은 테러로 신문발행은 나왔다 중단되기를 반복했다. 기자들도 수시로 경찰에 잡혀갔다.
남선경제신문이 신문사의 테러 사태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업자 간의 경쟁이나 정치적인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신문에 대한 테러는 언론자유에 대한 탄압인 동시에 민주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봤다. 민성일보는 테러로 시달리다 1949년을 목전에 두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신문업계가 언론자유와 민주 질서를 지키려 한목소리를 낸 것은 동업자 정신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 같은 동업자 정신인들 백날 있어도 누가 탓하랴.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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