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뭄이 심했는데 며칠간 단비가 내렸다. 대기가 맑아져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보이고 화단에는 꽃나무들이 생기를 얻어 잎사귀가 반짝거린다. 오랜만에 거실에서 음악을 듣는다. 청명한 봄 하늘만큼 상쾌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나온다.
음악회에 가면 연주자가 준비한 프로그램 이상의 프로그램이 있다. 앙코르다. 관객은 이것을 기대하지 않은 덤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은 더 중요한 핵심 프로그램으로 보는 편이 맞다. 연주자에 따라서는 본 프로그램에 집중하기 위해 앙코르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관객의 호응에 대한 보답으로 앙코르를 준비한다.
앙코르 인심이 좋기로 유명한 연주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다. 정경화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관객의 커튼콜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브게니 키신 또한 관객이 지칠 때까지 앙코르 요청을 다 받아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앙코르는 주로 짧은 소품이나 가곡, 소나타나 콘체르토 중에서 가장 기교적이거나 인상적인 한 악장을 연주한다. 또는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곡을 선사하기도 한다. 소품은 짧기 때문에 연주자의 역량을 집중해서 드러낼 수 있고 연주 효과도 뛰어나다. 앙코르는 관객의 반응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연주자와 관객이 직접 소통하기에 연주회 중 가장 흥분된 시간이 되기도 한다.
1983년 정경화가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던 연주회에 간 적이 있다.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짧은 커트로 돌아온 그녀는 레퍼토리를 모두 소화하고도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을 거의 10곡 가까이 앙코르곡으로 들려주었다. 환희의 순간이 계속되었다. 박수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울먹이는 관객도 있었다. 마침내 지쳐서 피아노 의자에 주저앉은 그녀가 더 이상 할 수 없겠다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관객은 계속 앙코르를 요청했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답례를 했다.
소품은 연주자의 기량을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호응이 뜨겁다. 여기에 연주자의 매너와 겸손한 태도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음악회가 완성된다. 전경화의 독주회에 갈 때마다 이런 경험을 했다. 그녀는 연주회뿐만 아니라 음반 작업을 개인적 고백이자 영혼의 탐구라고 했다. 이러한 가치관을 잘 드러낸 그녀의 음반들은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정경화는 앙코르곡에도 레퍼토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가장 최근에 들은 드뷔시의 '아름다운 밤', '아마빛 머리카락의 아가씨', 포스터의 '금발의 제니' 등은 매우 시적이고 서정적인 곡들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음색과 섬세하고 깊은 선율로 정경과 인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숨겨진 내면을 불러내고 자신의 경험이 녹아든 내밀한 이야기들을 바이올린으로 들려주고 있었다.
한때 정경화는 자기를 불태우는 격정적인 연주가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거장의 원숙함과 마르지 않는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 관객도 좋아하는 연주가와 함께 성장하고 깊어져 간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한동훈·가족 명의글' 1천68개 전수조사…"비방글은 12건 뿐"
사드 사태…굴중(屈中)·반미(反美) 끝판왕 文정권! [석민의News픽]
"죽지 않는다" 이재명…망나니 칼춤 예산·법안 [석민의News픽]
"이재명 외 대통령 후보 할 인물 없어…무죄 확신" 野 박수현 소신 발언
尹, 상승세 탄 국정지지율 50% 근접… 다시 결집하는 대구경북 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