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洛東江)은 안동 부근에 이르러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와 합류한 후 서쪽으로 흐르다가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부근에서 강줄기가 크게 금성환포(金星環抱,둥글게 감싸다)한 후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지보(知保)'란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 되었을까? 태을산(太乙山) 아래에는 우리나라 8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 중시조인 정사(鄭賜, 1400~1453)의 묘소가 있는 지형이 여근(女根)의 형상인데 이것을 거꾸로 한 지명이 '지보'이다. 옛날 버스 안내원이 있던 시절 '지보' 간다는 안내 말을 하려니 민망하여 '고향 갑니다, 고향 갑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낙동강 건너편 의성 비봉산이 수려하게 솟아
정사의 묘소 현무봉인 태을산 청룡 방에는 동래 정씨 재사인 '지보재'가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의 지보암(知保庵)으로 지보재 정문 앞쪽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있다. 이를 보면 '지보'라는 이름은 오랜 기간 사용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정사는 정승원(鄭承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해(鄭諧)이고, 아버지는 정구령(鄭龜齡)이며, 어머니는 박문로(朴文老)의 딸이다. 1420년(세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어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감찰·정언·검열을 역임하고 이조·예조·형조의 낭관을 지냈다. 1448년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경상도로 가서 일본에서 오는 단목(丹木)·동·철[鑞鐵] 등을 수령하였다.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경상도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정광필(鄭光弼) 등과 함께 봉안되었다. 사후 찬성에 증직되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 5명과 손자 10명을 두었다. 그중 3남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은 동래정씨가 조선에서 명문가 반영에 오르도록 한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손자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하여 현손인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등 총 13명의 후손이 정승에 올랐다.
그가 고향인 예천 용궁에서 세상을 뜨게 되니 아들 5형제가 주변의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지금의 지보면 지보리(도장리)에 이르게 되었는데 낙동강 건너편 의성 비봉산이 수려하게 솟아 있으니 저 산을 조안산으로 하는 곳에 틀림없이 좋은 터가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박 풍수라는 사람과 함께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
지보리 마을 입구에 이르게 되자 옥녀봉 자락에 명당처럼 보이는 곳에 한 무리가 광중(壙中,널을 안치하기 위하여 판 구덩이)을 파고 있었다. 형제들이 박 풍수와 함께 가까이 가 보니까 광중에 물이 나서 더 이상 일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단념하려던 참이라 이야기 끝에 이 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묘소에서 좀 떨어진 곳 세 곳을 찾아 우물을 팠더니 광중의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왕겨와 대나무 젓가락을 넣었더니 파 놓은 우물로 나왔다. 마침내 광중 안의 물이 다 빠져나가서 정사 선생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온다.
명혈에는 이러한 설화가 따라다니지만 설화는 설화일 뿐, 필자의 생각으로는 처음 광중을 판 곳은 현 묘소보다 아랫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아래는 물이 모이는 장소라 땅을 파면 당연히 물이 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념수로 심은 회화나무,신목대제
그의 부친 정구령이 1425(세종 7)년 결성 현감으로 부임하여 기념수로 심은 회화나무가 올해 598세를 맞이했다. 신목[槐木]이라 불리는 이 나무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오는데 1935년 결성 관아인 형장청(刑將廳)이 일본지서로 쓰였다. 이때 지서장으로 발령 난 일본인 야마구찌(山口)가 신목의 가지가 보기 싫다 하여 가지를 직접 잘랐는데 이후 벙어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발령받아 오는 일본지서장마다 신목제를 올리고, 해방 후에도 지금까지 신목대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정구령의 묘소는 산의 형세가 말 모습과 같다하여 명명된 마산리(馬山里) 소재 완담향사 뒤편 산록에 있다. 갈마음수형의 중상급 명혈로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자리이지만 입향 오류가 되어 있는 점이 아쉽다. 그는 결성 현감을 역임한 후 이듬해 풍양면 우망리에 터를 잡아 이곳의 입향조가 되었다. 인근 청곡리 포내 별실(浦內別室)에 삼수정(三樹亭)을 짓고 회화나무 3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한그루만 남아 노거수로 성장했다.
정사의 묘소 주산은 옥녀봉이며 풍수물형으로는 옥녀측와형(玉女側臥形) 즉, 미녀가 다리를 접고 비스듬히 누워 거울을 보고 있는 형상으로 좌향은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비봉산이 여기에서 보면 건장한 남정네로, 어여쁜 여인이 벌거벗고 누워 있으니 힐끔거리며 보고 있는 모습이랄까! 재사 옆 묘소 안내문에도 '옥녀측와형'으로 표기 되어있다.
이곳은 여근의 형상이니 음양의 이치에 의거 남근이 있어야 한다. 인공위성 그림을 참조하여 보면 지보재 뒤편 나지막한 산이 영락없는 남근의 모습이다. 완벽한 자연은 없는 법 이곳은 후손 번창하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여근과 남근이 가까이 있으니 음행이 발동 할 수 있는 기운이 있다.
동래정씨 문중에서는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華池山) 자락에 터 잡고 있는 동래 정씨 중시조 2세 호장공(戶長公) 정문도(鄭文道)의 묘와 더불어 이곳에 있는 정사의 묘를 양대 정묘(鄭墓)라 하며 명혈 중의 으뜸이라 여기고 있다.

◆양대 정묘는 많은 풍수사가 필답 코스
양대 정묘는 많은 풍수사가 필답 코스로 찾아보는 유명한 묘이기도 하나 풍수사마다 평가가 다르기도 하다. 이 자리에 대하여 형기론자들의 주장은 뚜렷한 주산이 없고, 내청룡과 백호가 자리를 보호하지 못하며, 특히 내백호가 비주하는 모습 등을 보면 명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면 풍수 현장 교과서라 할 정도로 훌륭한 장소에 터 잡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묘소는 수많은 정승을 배출하였으니 당연히 대명당일 것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으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중상급의 명당으로 본다. 그렇다면 정승이 연이어 배출된 원천은 어느 묘소인가? 그것은 인근 만화리(晩華里)에 있는 증조부 정승원 묘소이다. 형기상으로 약간의 결함은 있으나 술좌 진향(戌坐辰向)의 대명당이다. 다만, 재혈과 입향오류로 그 발응이 늦어진 것으로 본다. 저 멀리 묘소에서 보이는 검무산(劒舞山)이 정승사(政丞砂)이다.
결론적으로 증조부 묘소를 포함하여 부친 정구령과 정사의 묘소 등 여러 기의 명당과 인연이 되니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고, 후손들이 당대 최고의 명사를 초빙하여 좋은 자리를 구할만한 신분과 여건이 되었기에 이후에도 여러 기의 명당 터를 구하여 썼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사의 묘는 행정구역상으로 지보면 도장리 산38번지에 있다. 지보라는 지명이 정사 선생의 묘소 형상으로 인하여 명명되었는데 정사 선생의 묘소의 행정구역이 도장리로 되어 있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행정구역 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끝으로 천지자연과 음양 조화의 기운이 발산되어 출산율이 높아지기를 기원한다.

노 인 영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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