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가 이인화의 온고지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1565년 4월 6일 20년간 조선을 철권통치하던 문정왕후가 죽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나 새 시대의 희망을 꿈꾸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즉위한 뒤 9년간 수렴청정을 했고 형식적으로 수렴청정을 철회한 뒤에도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에서 도첩제와 승과를 부활시켰고 승려 보우를 국사로 삼아 대대적인 불교 중흥을 단행했다. 그녀가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원천은 1545년 을사사화로 시작된 잔혹무비한 독재였다.

공포의 독재 시대가 끝났다. 사람들은 바른 말 하는 씩씩한 선비들에 이 공론을 만들고 공론에 따라 나라가 운영되는 정상적인 국가를 원했다. 이 무렵 이런 국가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가 동의한 인물이 퇴계 이황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국정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퇴계는 서울로 오지 않았다. 자신은 "세상을 경륜할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서울에서는 계속 벼슬을 내렸고 퇴계는 퇴계라는 자신의 호처럼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예조판서로 임명되었을 때는 사퇴한 뒤 하직도 하지 않고 바로 안동으로 가버렸다. 기대승이 편지를 보내 그렇게 떠나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비판하자 퇴계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가 몸을 바쳐야 할 곳에서 의(義)가 실현될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당장 떠나야 그 의에 위배됨이 없다."

퇴계의 이 말은 전형적인 출처론, 즉 개인의 바람직한 거취에 대한 유가적 행동 논리의 표명이다. 즉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구하고 나아가 의를 행하여 자신의 도를 실현한다."는 <논어> 계씨 편의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퇴계가 이토록 단호하게 서울을 떠나 구하고자 했던 뜻이 무엇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퇴계는 안동으로 돌아가서 안동에서 죽었다. 퇴계의 일생은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서울에서 살고 서울에서 죽었던 율곡과 확연히 대비된다.

율곡은 현실적인 대응 능력이 없는 '도학'을 비판하고 '경세' 즉 국정운영을 선비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했다. 그러나 퇴계는 경세를 넘어서 보편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퇴계는 정치적으로 승리한 사림파가 당쟁으로 참담하게 분열할 것을 내다보았다. 주자학을 독실히 공부하여 인생과 세계에 대해 깊이 득도한 이 노학자는 문정왕후가 죽었다고 해서 증오와 적개심으로 가득찬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퇴계에게는 자만에 빠진 사림파와 국정을 운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 시대를 초월한 선비의 임무였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썼듯이 '아침 이내와 저녁 노을, 바람과 달빛을 친구 삼아 늙어가는 삶'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생활이었다. 자연의 고요함과 영원함을 느끼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생활이었다.

퇴계는 계절의 변화에 놀라고 또 놀라면서 경외감을 느꼈다. 그런 경외감이 습관이 되고 기본적인 태도가 되는 인생의 가치를 자신의 글과 행동으로 구축했다.

이 무렵 퇴계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쓴 일기이다. 의성 김씨 가문의 다섯 형제,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은 모두 퇴계에게서 공부했다. 이 가운데 김명일의 운암일기가 특히 자세하다.

퇴계가 사는 도산의 3칸 모옥에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고 퇴계는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손님들을 맞고 술을 마셨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옛 경전의 중요한 내용, 도전적인 내용, 재미있는 내용을 토론했다.

퇴계는 공부하러 온 제자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주입시키지 않았다. 생각할 주제를 정해주고 스스로 읽고 공부한 뒤 선생에게 질문을 해보라고 했다. "선생께서 손수 잠(箴)과 명(銘)을 써 주시고 서재에 유숙시키면서 몇 달 동안 질문을 하게 하셨다." (운암일기 1567년 6월 7일)

질문할 주제를 생각하면서 제자들은 퇴계를 따라 주변의 산을 오르고 그림을 보고 시를 짓고 음악을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적한 산골인 안동 곳곳을 다니며 할 수 있는 모든 예술과 토론을 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퇴계가 느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로 자신을 채웠다.

퇴계의 제자들은 스승과 함께 매일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라는 정기적인 경외심 체험을 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세상의 풍요로움과 선함, 재미로움과 신기함을 받아들였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학습'을 시키지 않았다. 퇴계의 제자 307인의 명단이 수록된 <도산급문제현록>에는 '유문(遊門)'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수일은 13세부터 선생에게 유문하였다."같은 문장이다. 이 문장은 물론 가서 공부했다는 의미이지만 글자 그대로 선생의 문하에서 '놀았다'는 의미도 강하게 담겨 있다. 제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스승에게 문안인사하고 같이 등산하고 산책하고 소풍 가고, 스승 옆에서 술을 얻어 마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가능한 한 많이 읽고, 많이 놀라고, 많이 긍정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을 향한 감사의 마음, 세상을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경외심의 영적 에너지로 세상의 증오와 적대감에 대항하여 싸우는 선비들이 되었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은 복잡해졌다. 과학기술의 위력이 인간을 압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힘은 여전히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고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퇴계가 은거하여 구했던 뜻은 아직도 살아있다.

소설가 이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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