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희숙 칼럼] 우물안 운동권 개구리와 한국 외교

윤희숙 전 국회의원

윤희숙 전 국회의원
윤희숙 전 국회의원

바야흐로 외교의 계절이다. 한미 정상, 한일 정상, G7처럼 굵직한 외교 이벤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외교 사안이 언론에서 다뤄지는 방식을 보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커녕 여의도를 방불케하는 정파 간 싸움뿐이다.

각종 시사 프로에서는 전 정부 고위직 인사들이 무절제하고 거친 공격을 연일 퍼부으며, 정부의 외교 노력을 폄훼한다. 외신의 평가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평가가 소폭 수정되지만 한번 형성된 여론이 크게 반전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지금 같은 글로벌 대전환기에 나라가 어디를 향해야 하고 무엇에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지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이런 정략적 공격 속에서 실종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언론 환경의 저급화이다. 공영방송과 상업방송, 개인 유투브 간의 차이가 사라졌다. 다들 함께 선정적으로 경쟁하는 가운데, 공영방송마저 방송의 질을 높이려는 투자와 관심은 희박하다. 방송작가들이 게스트를 부르고 질문 내용을 추릴 때 통상 하는 일은 인터넷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본 후 자극적인 말을 쏟아내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그러니 외교를 국가적 사안이 아니라 정파적 사안이라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방송에 빨리 출연해 비판적 내용을 얼른 설파하는 것이 기선을 잡는 길이며, 자신들의 주장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다. 친야 인사들이 자체 핵무장을 줄곧 반대해 왔으면서도 한미 정상의 워싱턴 선언을 '핵 자주성 포기'라 비난하는 것을 보면, 논리적 비일관성까지 개의치 않으며 속도전에 임하는 것 같다. 공영방송에서 대통령 방미 해설을 위해 친야 패널을 친여 패널의 8, 9배 출연시켰다는 보도는 이런 구조를 잘 보여준다.

두 번째, 우리나라 지식인 그룹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외교처럼 비정파적이어야 할 사안에 대해서도 친야 패널과 친여 패널의 시각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본질적 차이는 바로 북핵 위협에 대한 태도이다. 야당 쪽 인사들의 공통점은 미사일을 쏴 대는 북한을 위협이라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핵을 겨눈 북한을 규탄하거나 그들을 감싸는 중국을 비판하지 않는 반면, 윤석열 대통령이 중국의 심기 보호에 소홀하고 북한을 자극한다며 법석이다. 이를 듣고 있노라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북한 핵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인가 싶을 정도다. 이렇게 본말을 전도해 버리니 미국과 핵협의그룹(NCG)을 만들기로 한 탁월한 외교 성과도, 바닥을 친 한일 외교를 되살린 것도, 가차 없이 평가절하되고 굴종 외교라 채색돼 버린다.

어떻게 국가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이렇게까지 결여될 수 있을까? 북한과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 동경에 빠져 있던 운동권 학생 시절 마음 자세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안 된다. 변화하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40년 전 '반미반일자주투쟁' 사고에 잠겨 있어야 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에 분명한 선택을 강요받는 세상이 됐다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는 우물 안 운동권 개구리들이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일단, 원하든 원치 않든 국가의 운명까지 정파적으로 써먹는 세력이 전에 없이 강력하고, 권력 탈환을 위한 여론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시위가 만연했던 40년 전이 아니라, 그때의 운동권 학생들이 그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목소리를 내는 지금이 오히려 더 심각한 이념 전쟁의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하려 해도 국민과의 진정성 있는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정부가 기울이는 노력의 의미가 무엇인지 국민에게 정확하고 성의 있게 설명해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정책 방향을 올바로 잡는 것만으로는 나라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

지식인 사회 역시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불안해했던 경험이 있다면, 그때의 정책 결정자들이 지금 권력을 되찾겠다며 방송과 신문을 누비면서 속도전, 지구전을 벌이는 것을 보며 책임감과 참여 의식을 느꼈으면 한다.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공적인 마음 자세가 고상하게만 발현될 수 없는 혼탁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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