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순, 중년의 한 남자가 기차를 타고 눈의 나라로 진입한다. 도쿄에서 3시간 걸려 도달한 곳이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눈의 나라를 맞닥뜨린 주인공의 인상이자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하얀 바닥만 끝없이 펼쳐진 설야의 전경이다. 권태로운 도시의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꿈꾸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이 낭만적인 서정을 배경으로 시마무라는 한 여자와 달콤한, 그러나 불온한 로맨스에 빠져든다. 뒤로 가면 여자 한 명이 추가되어 삼각의 긴장을 형성한다. 불온하다 했거니와 시마무라는 도쿄에 멀쩡한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다. 결국 '설국'은 불륜 소설이란 말인가? 이게 노벨상을 받을 만큼 명작이라는 데 의혹과 실망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스웨덴 한림원은 뭐라고 했는가? "자연과 인간 운명에 내재하는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고 시상 이유를 요약했다. 실로 '설국'은 당대의 역사의식이나 윤리 같은 것은 철저히 외면하고 오로지 한 인간의 심미적 시선만 쫓는다. 그 치열함과 도저함에 비하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은 피상적이라는 것.
우선, 시마무라의 시선에 포착된 설국의 여인 고마코의 미적 양태를 보자. 그녀는 너무나 정갈해 "발가락 밑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 같고", "그 목덜미에는 삼나무숲의 짙은 푸르름이 감돈다" 그런가 하면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아름다운 거머리가 움직이듯" 요염하고 "가슴은 손바닥 안에서 서서히 뜨거워지는" 정열의 여인이다.
19세의 여자에게 눈처럼 서늘하고 정결한 이미지와 불처럼 뜨겁고 선정적인 이미지가 겹쳐 있다. '설국'의 미적 절정은 이 상극의 눈과 불이 순간적으로나마 공존하는 지점에 자리한다. 그 정황은 이렇다. 첫눈 내린 저녁,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데이트를 하다가 2층 고치 창고에 불이 난 것을 목격한다. 마침 거기서 요코라는 여자가 떨어진다. 요코는 고마코가 동생처럼 아끼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시마무라의 시선을 앗아가는 연적이다. 시마무라는 요코의 아름다움을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와 "찌르는 눈빛"으로 특징짓곤 했다. 이 요코가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는 고치 창고의 화염에서 낙하한 것이다. 그 모습이 시마무라의 눈에 이렇게 포착된다.
여자의 몸은 공중에서 수평이었다. 시마무라는 움찔했으나 순간 위험도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세계의 환영 같았다. 경직된 몸이 공중에 떠올라 유연해지고 동시에 인형 같은 무저항, 생명이 사라진 자유로움으로 삶도 죽음도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추락의 찰나를 저리도 아름다운 정물화로 포착해내는 것은 두 눈이라기보다는 저장된 환영이다. 요코에 대한 시마무라의 환영은 3년 전 노을 지는 저녁에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날 차창에 비친 "야광충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요코의 눈에 섬찟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 시마무라는 그 요코의 실신한 몸을 안고 휘청이는 고마코에게 다가간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발에 힘을 주며 눈을 드는데 하늘로부터 "은하수가 쏴 하며 몸속으로 흘러든다"
'설국'의 마지막 문장이다. 눈과 불이 부딪혀 서로 용해되는 순간에 찬란한 은하수가 내려와 합류하는 씬이다. '설국 미'의 절정이다. 저런 미적 형상을 1930년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그려냈다. 상 받을 만하지 않은가. 시마무라의 직업이 무용 연구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스나리 자신이 춤의 미에 깊이 경도된 사람으로서 "춤은 움직이는 회화이자 몸으로 쓰는 시"라고 했다. 이래저래 '설국'의 미학은 준비된 것이라 하겠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