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쓸모없는 게 곧 쓰임새(無用之用), 가죽나무

대구 경상감영공원의 가죽나무
대구 경상감영공원의 가죽나무

가죽나무 가지가 부러지니 달그림자 난간에 어리고

(假僧木折月影軒 가승목절영헌)

참미나리 나물이 맛 좋으니 온 산이 봄을 머금었도다

(眞婦菜美山妊春 진부채미산임춘)

산 위에 돌은 천년을 굴러야 땅에 이를 듯하고

(石轉千年方到地 석전천년방도지)

높은 봉우리는 한 자만 더하면 하늘을 찌르겠네

(峰高一尺敢摩天 봉고일척감마천)

청산을 사고 보니 구름은 절로 얻은 셈이요

(靑山買得雲空得 청산매득운공득)

맑은 물가에 다다르니 물고기는 저절로 오도다.

(白水臨來魚自來 백수임래어자래)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김병연이 금강산 입석봉 아래 한 암자에서 시를 잘 짓는 노승을 찾아가 스님과 함께 한 구절씩 주고 받으며 읊은 시[金剛山立石峰下庵子詩僧共吟]의 일부분이다. 연주시(聯珠詩)에 나오는 가승목은 가죽나무의 옛 한자 이름이다. 가죽나무는 '가중나무'라고도 부른다. 봄에 새순을 먹을 수 있는 '참죽나무'와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지만 먹을 수 없는 '가짜 죽나무'라는 뜻으로 '가죽나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가죽나무는 도시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구 도심 동산병원이나 경상감영공원에는 아름드리 가죽나무가 하늘을 받치듯이 치솟아 한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5월에는 잎 대궁 사이로 내민 길고 푸르스름한 꽃대에 하얀 꽃이 핀다. 가지의 키가 높은 까닭에 사람들의 눈높이에서는 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 자라면 높이가 20m, 흉고(사람 가슴 높이) 둘레가 한아름은 훌쩍 넘어 영어권에서는 'Tree of Heaven(하늘 나무)'이라 부른다. 한자 이름도 여러 개 있다. 잎 떨어진 자리가 마치 호랑이 눈 같다고 해서 호목수(虎目樹) 혹은 호안수(虎眼樹), '냄새 나는 참죽나무'라는 뜻의 취춘수(臭椿樹)로도 불린다. 특히 '쓸모없는 나무'라는 의미로 한자 樗(저)를 쓴다. 옛 선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을 말할 때나 자기를 낮춰 말할 때 저력지재(樗櫟之才)라고 했다. 저력의 저(樗)는 가죽나무를, 역(櫟)은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를 일컫는다.

옛날에는 가죽나무로 주사위를 만들어 놀았는데 저포(樗蒲)라고 했다. 백제 때부터 즐긴 놀이로 주사위를 던져 끗수로 승부를 겨룬다. 조선 전기 학자이자 생육신인 김시습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에 나오는 단편 「만복사저포기」의 '저포'는 바로 이 주사위 놀이를 말한다.

대구동산병원의 가죽나무
대구동산병원의 가죽나무

◆가죽나무 새순을 먹는다고?

경상도 사람들은 가죽나무 순을 먹는다고 말한다. 이는 새순을 나물로 먹을 수 있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로 부르고, 표준어의 진짜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라고 부르기 때문에 참 헷갈린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 마을의 집 터 뒤에 수령이 170년, 높이는 10여m, 흉고 둘레가 2m 넘는 보호수 '가죽나무'를 찾아가 보았지만 아쉽게도 참죽나무였다. 주민에게 물어보니 먹을 수 있는 '참가죽나무'라며 '개가죽'은 아니라고 말했다. 안내표지에도 가죽나무로 적혀있으니 나무 이름을 혼동할 만하다.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가죽나무' 순도 실은 참죽나무 순이다.

개옻나무, 개비자나무, 개살구나무, 개두릅나무(엄나무), 개머루, 개다래나무처럼 이름에 접두사 '개'가 붙으면 원래 이름보다 뭔가 뒤떨어지거나 효용가치가 덜한 아류로 여긴다. 나무 잎이나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참죽나무는 멀구슬나뭇과이고 가죽나무는 소태나뭇과이므로 전혀 다른 가문의 나무다.

가죽나무는 사람들 곁에 살면서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 도시 공터나 자투리 땅, 하천 제방 등에 자리가 보이면 강인한 생명력으로 틈새를 비집고 왕성하게 뿌리를 내린다.

성장이 빨라 재질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영 형편없는 나무의 대명사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목재는 황백의 밝은 색을 띠고 판자를 켜면 물관 배열이 아름답게 나타난다. 녹음이 짙어지면 나무의 모양새는 가지가 옆으로 잘 뻗어 제법 품위를 갖추고 있으며 공해에도 강하여 최근에는 가로수나 조경수로서 주목받고 있다. 암수가 다르므로 꽃가루가 날리고 냄새가 심한 수나무보다는 주로 암나무를 선택해 심는다.

가죽나무는 중국에서 온 귀화식물이다.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저포놀이가 백제 때 비롯됐으므로 적어도 1천 년 전에 한반도에 정착한 것 같다.

가죽나무의 꽃은 초여름에 핀다. 초록색이 도는 흰색이다. 열매는 가운데 씨앗을 두고 양옆으로 길고 납작한 날개를 달고 있다. 열매가 바람을 타고 이동하기 좋아 먼 곳 아무 데서나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한겨울에 뻘쭘할 정도로 키가 큰 나무에 회갈색 열매가 수북이 달려 있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가죽나무일 것이다. 모성애가 강해서인지 이듬해 봄까지 열매를 달고 있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의 군보호수 참죽나무.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오리의 군보호수 참죽나무.

◆밭둑에 기르는 참죽나무와 구분

『장자』의 「소요유」에는 대춘(大椿)이라는 전설의 나무가 나온다. 참죽나무를 가리키는 말로 '아주 옛날에 대춘이라는 나무는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는 장수(長壽)의 상징이다.

남의 아버지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존칭인 춘부장(椿府丈)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됐다.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춘(椿) 나무가 심어진 집에 비유하여 춘당(椿堂)·춘정(椿庭)이라고도 일컫는다. 춘부장의 장(丈)은 어른이란 뜻이다.

현실적으로 집 부근이나 밭둑에 있는 참죽나무는 대부분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나무 수형이 아주 단출한 게 나무로는 볼품없다. 해마다 봄철 사람들의 먹거리로 새순이 끊기는 수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가만 내버려두면 높이 20~30m까지 자라는 거목이다.

참죽나무는 가죽나무와 비슷하다. 아까시나무처럼 한 대궁에 여러 장의 잎이 깃털 모양을 이루는 겹 잎도 유사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참죽나무는 작은 잎이 12~22개의 짝수를 이루며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아랫부분에 선점이 없다. 반면 가죽나무는 작은 잎의 개수가 13~25장 홀수로 달리며 아주 큰 톱니가 2~3개 있다.

이 톱니의 끝을 만져보면 딱딱한 선점(사마귀)가 만져지며 거북한 냄새가 난다. 줄기의 껍질도 참죽나무는 옛 장수들의 갑옷처럼 생겼으나 가죽나무는 어릴 때는 회갈색으로 갈라지지 않으나 나무가 크면서 흑갈색으로 진해지며 얕게 세로로 갈라진다.

가죽나무 꽃
가죽나무 꽃

◆크긴 하나 쓸모없는 나무인가

『장자』(莊子) 「내편」(內篇) 첫 장인 「소요유」(逍遙遊) 마지막 부분에 혜시(惠施)가 장주에게 건넨 말에는 가죽나무를 '크긴 하나 쓸모가 없는 나무'로 나온다.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르길 가죽나무라고 하오. 큰 줄기는 울퉁불퉁한 옹종이 있어 먹줄을 칠 수도 없고 작은 가지는 돌돌 말리고 굽어져 그림쇠와 곱자를 댈 수 없으니 길가에 서있으되 목수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 지금 선생의 말은 크긴 하나 쓸모가 없으니 뭇사람들이 한결같이 돌아서 가버리는 것이다."

이에 장자는 살쾡이와 큰 소의 우화를 소개한 뒤에 대답을 이어갔다. "지금 자네는 큰 나무가 있어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고장[無何有鄕]의 광막한 들에 그 나무를 심어 놓고 편안하게 그늘에 누워 있지 못하는가? 그러면 나무는 나무꾼의 도끼날에도 찍히지 않을 걸세. 아무도 그것을 해치지 못하지. 아무 데도 쓰일 바가 없으니 무슨 괴로움이 있는가?"

자유롭게 이리저리 거닐며 돌아다니는 '소요'는 장자가 추구한 인생관이었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을 통해 소요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장자는 간절하게 바랐다. 이런 장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혜시는 장자의 사상이 크고 높은 줄은 알지만 이상적으로 너무 치우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여겨서 말을 건냈다가 요즘 말로 도리어 '참교육'을 당한 셈이다.

가죽나무 열매
가죽나무 열매

◆무용지용의 처신

나무의 입장에서 볼 때 쓸모 있는 나무들은 효용 가치 때문에 고통스러운 참상과 수난을 겪는다. 유실수의 경우 굵고 큰 열매를 맺도록 하려고 꽃이 솎이고 가지가 잘리고 꺾여서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동량으로 좋은 나무 역시 다른 나무보다 먼저 도끼날을 맞거나 톱으로 잘리는 신세를 못 면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가죽나무는 무용지용을 통해 이루어 낸 생존전략을 넘어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경지에 노니는 나무로 자란다.

『장자』에 나오는 무용지용의 사례는 가죽나무뿐만 아니라 사당에 몸을 맡겨 천수를 누리는 상수리나무도 있다. 앞에 언급한 저력이다. 「인간세」 편에는 쓸모 있기 때문에 일찍이 재난을 당한 사례로 가래나무, 잣나무, 뽕나무, 계피나무, 옻나무 등이 소환된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잘생긴 나무는 나무꾼의 눈에 띄어 일찍 잘린다. 못생긴 나무는 못생긴 덕분에 산을 지키고 굵게 자란다.

대구 동산의 가죽나무
대구 동산의 가죽나무

나무의 입장에서는 잘난 나무들의 잘생김과 목재로서 유용성이 화근이 되지만 못생긴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천수를 누리게 된다. 쓸모없음[無用]이 되레 유용(有用)으로 바뀌는 '대반전'이다. 이쯤되면 무용지용이란 말에는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역설도 포함된다.

『장자』는 쓸모에 대한 좁은 생각에 얽매여 큰 관점에서의 가치를 놓쳐 버리는 것을 지적했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쓰임새[有用之用]는 알면서도 쓸모없는 것의 쓰임새[無用之用]는 알지 못한다." 「인간세」 마지막 구절의 경구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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