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왕 정조가 그린 '국화도'다. 정조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을 깊이 이해한 군주이자 20여 점의 그림, 편지글인 간찰을 포함하면 수백점이 넘는 서예, 400여 편의 시를 남긴 시서화 삼절의 왕이다. 영조의 국정을 보좌한 대리청정 기간을 포함해 14년을 왕세손으로서 제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대부분의 조선 왕처럼 정조는 학문과 예술의 교양을 갖춘 정치가였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명의 조선 왕 중에는 세종, 문종, 성종, 인종, 선조, 인조, 영조 등 그림을 그렸던 왕도 있고, 성종이나 숙종처럼 그림에 취미가 많았던 왕도 있었지만 직접 그린 그림이 남아 있는 왕은 정조가 유일하다.
정조는 독서를 좋아했고 문학을 사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뚜렷했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투철했던 정조는 군왕의 위상에 충실한 범주의 예술 활동을 했다. 정조의 시, 서예는 어제, 어필로서 통치의 과정에서 행사됐고, 간찰이나 그림은 좀 더 사적인 소통과 배려의 수단으로 활용된 어필, 어화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지니는 당연 조건을 잘 알고 있는 정조에게 시서화는 자신의 정치를 최대치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론의 하나였다. 왕이 직접 붓을 잡고 그린 어화는 어떤 물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하사품이다.
국화와 바위로 구성한 대작 '국화도'는 정조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맑고 투명한 먹색과 대상의 특징을 잡아 요약한 간결한 필치의 수묵화다.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묵국이라기보다 메뚜기와 들풀이 있는 문인화풍 초충도에 가깝다. 가을날의 서정이 느껴지는 야취의 국화는 벼랑의 곧 굴러 떨어질 듯한 바위에 의지해 위태롭게 피었다.
국화 위쪽으로 찍혀 있는 인장 '만천명월주인옹'은 정조가 만년에 지은 호다.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밝은 달의 주인'이라는 이 길고 독특한 호의 뜻을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로 지어 신하들에게 설명했다.
이 호를 짓기 2년 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놓은 수원에 화성을 완공하고 행궁을 지었다. 왜 막대한 재원을 들여 신도시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설명 중 '상왕설(上王說)'이 있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으로 물러나 자신이 왕위에 있는 한 불가능한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상왕설에 비추어 보면 아버지가 뒤주에서 굶어죽는 상황을 목격한 정조가 은거의 상징인 국화를 그린 심정이 이해된다. 할아버지 영조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후계자인 자신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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