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향 경제인] <22> 김시동 정문각 대표 "성공하려면 끈기·집념·열정 갖고 뛰어라"

의학서적 1천종 출간…일본식 의학 용어 한글로 통일해
고향사랑 적극·색소폰 음악으로 사회봉사…출향인들 한 마음으로 묶고파

김시동 정문각 대표는
김시동 정문각 대표는 "삶에 있어서도 5개년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끈기와 집념, 열정을 가지면 성공한다"고 강조했다. 이무성 객원기자

도서출판 정문각의 발자취는 우리나라 의학전문 서적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불모지였던 의학출판계에서 국내 저술 도서는 물론 선진 의학을 접할 수 있는 유수의 도서를 번역 출판해 오늘날 K-의학을 이끄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 '끈기, 집념, 열정'이라는 김시동 대표 특유의 기업가 정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출판업 반세기를 향해 달리고 있는 김 대표는 "삶의 5개년 계획을 세우라"고 권유했다. 자신을 믿고, 성공하겠다는 고민을 계획으로 구체화하여 실천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5년 목표를 3년 만에 달성하기도 했다는 그의 고향 후배들을 향한 격려의 말도 다르지 않았다. "부지런히 뛰고, 노력하고, 생각하라"는 당부다.

-정문각을 소개해달라?

▶의서(醫書) 전문 출판사다. 의학·치의학·한의학·간호학·보건학·미용학·수의학·생명과학 분야의 전문서적을 사명감 갖고 출간하고 있다. 규모가 커온 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내 저술도서 출판 위주에서 미국·중국·일본 등 외국 유수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는 단계로 변모했고, 자회사인 제이엠케이(JMK)도 설립했다.

-정문각만의 특장점이 있다면?

▶과거 국내 출판시장 중 부진했던 의학분야에서 원서에 의존해온 의학 용어를 통일했다고 자부한다. 전국의 의과대·치과대·수의과대·간호과대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과 토론한 결과다. 특히 백상호('해부학사전') 김용일('병리학') 서울대 의대·이흥식('수의해부학') 서울대 수의대·손태중('병리학') 경북대 의대 교수님이 떠오른다. 해부학적 용어 중 일본식 용어가 상당히 많은 것을 토론을 거쳐 우리식 용어로 통일시켰다. 한자식·번안식 의학용어가 주를 이루던 시절 의학용어집과 의학서적 편찬 작업에 참여해 토론과 논의를 통해 의학용어 통일과 한글화에 크게 기여했다.

-출판업을 하게 된 동기는?

▶꿈 많은 시절 갈만한 직장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은사이신 권순철 경북대 교수님의 소개로 의학서적 만드는 출판사에 뛰어들었다. 많은 고민 끝의 결단이었는데 사실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현재 의학출판계는 하루에도 수십 종의 의학 관련 도서들이 출간된다. 그 당시의 어렵고 힘들었던 고난의 역사가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해서 보람을 느낀다.

-기억나는 출간 서적이 많을 것 같은데.

▶수많은 책을 펴냈다. 정문각에서 500종, JMK에서 400종이 넘는다. 먼저 '인체해부학'·'인체생리학'·'병리학'·'미생물학'·'약리학'·'생화학'을 꼽을 수 있겠다. 특히 '인체발생학'은 임신 초기부터 태어 날 때까지의 생장 과정의 내용인데 당시 전국 의대·치대·한의대에서 교과서로 많이 활용됐다. 기초의학 분야 서적인 데다 의학도들이라면 반드시 끼고 공부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쓰러지면 가족 모두가 하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나. 만약에 성공을 하게 되면 가정이 다 같이 일어나는 거다. 몸과 마음이 지쳐도 열심히 일했다. 사업자금이 없어 궁리를 하다가 내 집은 전세를 놓고, 전세자금으로 나는 지하실 월세방으로 전전하며 강등된 셈이었지. 처는 아이들 3남매와 울고 불고 야단이고 난 자금이 없어 허덕일 때 처와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가족을 이해시키고 난 뒤 난 정신력으로 이겨내니 하루 3~4시간 잠을 자도 크게 피곤한 줄 몰랐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좋은 날 오리라 굳게 마음먹으니 사업이 일진월보(日進月步)하며 풀리기 시작했다.

-삶의 철학은?

▶과거 대부분이 그랬지만 유독 아버지 없이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유복자로 태어나 가족은 두 모자(母子)뿐이었고, 의식주도 늘 모자랐다. 아버지가 6·25 때 행방불명 돼 연좌제에 걸려 공직사회 같은 양지(陽地)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내 스스로 채우려고 했다. 육체의 힘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나.

김 대표의 성실과 근면을 보여주는 일화는 하나 둘이 아니다. 1970년대 서울의 고문사라는 출판사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김 대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밥 먹듯 했다. 다른 직원들에게 눈치가 보여 퇴근한 뒤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하는 식이었다. 하루는 사장이 밤늦게 회사에 들렀다가 김 대표를 보고는 "우리 회사에서 뼈를 묻으라"며 당시 집값이 300~400만원 할 때 거금 300만원을 수표로 끊어주며 집을 구하라고 했을 정도다. "사장이 있다고 일하고, 없다고 일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하지 못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신념이었다. 또 1년 중 절반을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지방 출장을 다닐 만큼 열정을 쏟았다.

-올해 계획과 중장기적인 꿈은?

▶시대 흐름에 따라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종이책과 멀어지고 있다. 다른 전공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전자책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의학 분야는 국가고시가 있다 보니 조금 덜한데 앞으로는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본다.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e-북 출간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대표님에게 고향은 어떤 곳인가?

▶어머니의 품 속 같고, 항상 그립고…. 내 고향은 봉화군 황전이며 경북 최북단이다. 지역적으로 높은 산악지대에 있다. 춘양목이라고 들어봤나요. 적송이다. 불에 탄 숭례문 복구 때 기둥이 2개 쓰였다는 말이 있다. 껍질이 얇고 재질이 단단하며 그 밑에서 자란 송이는 맛과 향이 월등히 뛰어나다. 또 물이 맑아 은어축제가 열린다. 산소 측정 결과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1등을 했다. 정자 암자도 100개가 훨씬 넘어 옛 선비들이 글 공부했던 자리이지. 전국에서 가장 많다. 언젠가는 돌아가 살고 싶은 마음이다

각종 공연 포스터 앞에 선 김시동 대표. 그는 색소폰 연주로 재소자들을 교화했고, 경로잔치를 벌이는 등 활발한 재능기부를 통해 사회봉사를 펼치고 있다. 이무성 객원기자
각종 공연 포스터 앞에 선 김시동 대표. 그는 색소폰 연주로 재소자들을 교화했고, 경로잔치를 벌이는 등 활발한 재능기부를 통해 사회봉사를 펼치고 있다. 이무성 객원기자

-앞으로 대구경북을 위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나?

▶재경대구경북시도민회 자문위원으로서 과거세대와 미래세대 연결고리가 되려고 한다. 서울에 있으면 대구경북 전체가 한 고향이다. 향우들과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도 하고자 한며. 개인적으로는 색소폰 음악으로 출향인들을 한마음으로 묶으려고 무한 노력하고 있다.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부탁드린다.

▶근면성실하게 몸 아끼지 말고, 노력하며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목표를 이루려면 절반은 미쳐야 한다. 고통과 인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피눈물 흘린 결실을 얻는다. 지금 서 있는 이 곳, 이 시간이 바로 시작이며 목표에 도달하는 첫걸음이다. 성공은 순간의 작은 성취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젊음을 바쳐 꿈을 향해 도전하는 용기를 갖기 바란다.

김시동 대표의 저서인
김시동 대표의 저서인 '책과 음악에 심은 사랑'.

◆김시동 대표는 누구

산에 가니 완연한 봄이 오는 듯/나뭇가지에 노오란 잎새들이/껍질을 벗기면서 병아리 알을 깨듯/그렇게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니/봄은 정녕 오는가 보다(김시동 대표 시 '고향 친구들에게' 중)

저서 '책과 음악에 심은 사랑' 속의 시 몇 구절에서 보듯 김 대표의 고향 사랑은 깊다. 지난해까지 재경봉화군향우회 회장을 지냈고, 봉화초·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 경북전문대학 총동창회장 등 여러 모임을 이끌어왔다. 정문각 본사 건물 이름도 고향에서 따온 봉화빌딩이다. 부동산 매입을 고민할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암시를 해주곤 한다고. 아들 현민 씨는 춘천에서 김현민 정형외과를 개원해 아버지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문학으로 자신을 가꾸었고, 음악을 고리로 한 재능기부에 적극적이다. 먹고 사는 일로 음악을 한동안 잊어 버린채 살다가 지난 2010년부터 색소폰을 매개로 교도소·군부대·양로원·요양원 등을 순회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유명 가수들과 손잡고 전국경로잔치를 벌여왔다. 성균관에서 의병대를 결성해 일본 아베 총리에게 선언식을 할 때 울릉도와 독도에서 연주한 '선구자'는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는 마포문화원 이사와 마포문인협회 회장. 마포로타리클럽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출판산업 진흥과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김 대표가 받은 감사장·패가 300개 가까이 된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무성 객원기자
출판산업 진흥과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김 대표가 받은 감사장·패가 300개 가까이 된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무성 객원기자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의 보유자다. 표창장과 감사장·패를 받은 게 300개를 육박한다.한국학술도서출판협회·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성균관유도회총본부 부회장을 지냈다. 출판문화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상과 한국과학기술도서상·마포구민상·지식경영인 대상을 받았다. 또 문화관광부·교육부·노동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장관상만 4개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온갖 고통을 딛고 서울에서 성공 신화를 써나간 김 대표는 "긴 세월을 돌아보니 한숨도 나오며 노년기에 접어드는 제 인생이 지나간 태풍 바람처럼 허무하고 쓸쓸하기만 하다"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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