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학년 친구들이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거나 오빠라고 부르라고 놀려서 자존심이 상했어요."
지난 10일 오후 2시 구미 해마루중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은 다음 달부터 도입될 '만 나이 통일법'에 대해 묻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연도를 기준으로 학교에 입학하는 기존 교육제도를 따르던 학생들은 다음 달부터 같은 학년임에도 나이가 달라지는 상황을 낯설게 느끼며 새로운 놀림거리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한 학생은 최근 같은 학년 친구로부터 '형'이란 호칭을 강요받았다고 했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실행되기 전부터 호칭에 따른 '서열 재정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 학생은 "만 나이 자체가 불편하다기보다 같은 학년인 친구가 '내가 너보다 형이고 누나이니 나에게 굴복해라'는 식으로 대하는 게 불편하다"며 "나이로 호칭을 나누고 서열을 정하는 게 싫은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간의 서열 갈등 조짐에 교사들도 근심이 깊다. 진로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는 "아이들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크게 싸우기도 한다"며 "아이들이 혼란을 느끼고 그 혼란이 싸움으로 번질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나이' 서열 언제부터?
인간이 표현하는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 한국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 간 서열 관계는 나이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고 나이가 권력으로 작용하는 이면에는 높임말과 낮춤말의 구분이 확실한 한국어의 존비어 체계가 자리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 본격 시행될 만 나이 통일법이 자리잡기 위해선 나이에서 오는 서열 문화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법제처도 이를 의식한 듯 '만 나이 통일법' 시행 홍보 자료를 통해 "만 나이 사용이 익숙해지면 한두 살 차이를 엄격하게 따지는 한국의 서열 문화도 점점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만 나이 도입으로 한국의 서열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을 많지 않았다.
경북에 사는 직장인 오모(27) 씨는 "대학에 다닐 때 1~2살 더 많다고 흔히 '똥군기'를 잡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이에서 오는 서열문화가 많이 불편했다"며 "직장에서도 수저를 놓는 건 막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빈번히 느끼는 서열 문화 중 하나"라고 말했다.
대학원에 다니는 김모(26) 씨는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반말하고 낮잡아 보는 이들로 인해 상당히 불쾌했다"며 "나이로 타인의 성취를 판단하는 것도 한국의 독특한 서열 문화에 비롯됐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높임말 체계는 향가와 이두 등에서 발견된 존경법과 겸양법으로 미뤄보았을 때 고대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형수', '재수', '도련님', '아주버님' 등 호칭어가 다양한 것 역시 오래된 서열문화의 잔재다.
다만 나이로 서열을 나누는 문화가 온전히 유교 문화에서 비롯됐다고는 볼 수 없다. 선비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학문을 중시했던 선비들은 나이와 상관 없이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면 친구를 맺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중 우정이 끈끈했다는 백탑파 구성원 간 나이 차이가 그것을 방증한다.
1737년생 연암 박지원은 1750년생 초정 박제가, 1741년생 형암 이덕무와도 허물없이 학문적 소양을 쌓았다고 전해 온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의 대표격인 다산 정약용도 '위아래 4살 차이는 서로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열에 따른 호칭 변화 '일제 잔재'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관행의 시작점은 일제강점기 시대 교육제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계에선 일본 초대 문부대신이었던 '모리 아리노리'를 주목한다. 그는 1886년 '사범학교령'으로 군대제도를 사범학교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일본 근대교육을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충성을 다하는 신민을 기르기 위한 장치로 재편했다.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호칭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는 지난 2019년 한국의 서열문화를 다룬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일본의 초등학교에선 4학년은 '님', 3학년 '사람', 2학년 '자(놈 자), 1학년 '애송이'로 부르도록 호칭화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1968년도 '국민교육헌장' 등에서 일제시대 때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오 교수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에서 "'황국의 신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가 '대한민국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로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만 나이 통일을 계기로 사용하는 언어 습관도 되돌아봐야한다고 지적한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서열 문화는 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해왔던 언어적 습관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며 "사회가 진보하고 생각이 바뀌면 언어는 자연스럽게 바뀐다"고 강조했다.
만 나이 통일법 시행을 앞두고 현장 혼란이 우려되는 만큼 좀 더 적극적인 정책 홍보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성영태 계명대학교 행정학 전공 교수는 "다음 달에 시행되는 법인데도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책자나 모바일 홍보물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안심할 수 있도록 홍보해야 한다. 혼선을 줄이는 방향으로 후속 작업에 신경 쓴다면 그간 헷갈렸던 나이 계산법을 통일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편익이 큰 정책이라 본다"고 말했다.
※만 나이, 연 나이, 세는 나이란?
만 나이는 매해 생일마다 한 살씩 더하는 나이를 말한다. 예컨대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된 1994년생은 생일이 지나기 전에는 28세가 되고 생일이 지나면 29세가 된다. 만 나이 도입으로 전 국민이 1~2세 어려지는 효과가 있는 셈이다. 연 나이란 현재 연도에서 출생 연도를 뺀 나이다. 1994년생은 생일과 무관하게 올해 29세가 된다. 세는 나이는 태어난 해를 1살로 삼고 새해 첫날에 한 살씩 더하는 한국식 나이 셈법이다. 1994년생의 올해 나이는 30세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다고 해서 다음 달부터 모든 법령에 '만 나이'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보호법과 식품위생법, 병역법, 초중등교육법 등은 여전히 '연 나이'를 적용한다. 술, 담배를 판매할 수 있는 성인 기준과 군대 입대를 위한 연령 표기는 기존과 같다. 학교 입학 연령도 그대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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