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병합의 실무 주역인 고마쓰 미도리(小松錄) 통감부 외사국장은 "군인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냈다"라고 자화자찬했다. 대체 이처럼 허무하게 일본에 주권이 넘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개설되자 고종은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통감부에 황제 자신이 사용하는 예산(돈)과 황실 재산은 절대 손대지 말라는 요구각서를 제출했다. 당시 고종의 황실비는 대한제국 정부 예산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을 국고에 귀속시키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은 고종의 요구를 무시했다.
통감부는 곳곳에 숨겨놓은 고종의 비자금을 추적하여 국고로 환수하고 고종이 정부 재정에 손을 못 대도록 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폭로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일본 정부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통해 고종이 원하는 것은 제멋대로 쓸 수 있는 비자금(황실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돈으로 매수가 최고의 방법
1910년 7월 28일 제3대 통감이자 초대 조선 총독으로 내정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병합계획서를 들고 경성(서울)에 도착했다. 일본 정부는 병합 과정에서 서구 열강의 개입을 우려했다. 황제나 대한제국 지도부가 병합에 저항하면 무력 진압해야 하는데, 이때 서구 열강이 개입하여 엉뚱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병합을 이루려면 무력을 통한 강점이나 주권 찬탈이 아니라 국제적 합의(조약) 형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약 체결권을 가진 황제와 그 일족을 극진히 예우하는 회유책(돈으로 매수한다는 뜻)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1910년 7월 8일 일본 각의는 대한제국 황실을 폐지하고 이들을 조선 왕공족으로 편입시킨 후 매년 세비로 150만 엔을 지급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 총리 연봉이 1만 2천 엔, 일본 1개 황족의 연간 세비가 4만~10만 엔(1927년 11개 황족 전체의 연간 세비 80만 엔)에 불과했다. 이와 비교하면 조선 왕공족에 대한 예우는 실로 파격적인 거액이었다.
8월 4일,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와 이완용 총리의 비서 이인직이 병합 교섭을 시작했다. 고마쓰는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를 병합할 때 국왕을 외딴섬으로 추방한 사례, 미국이 하와이를 병합한 후 국왕을 시민으로 격하시킨 사례 등 살벌한 구미의 식민지 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그에 맞는 예우를 약속했다. 또, 내각 대신에게도 작위를 수여하고 세습 재산을 제공한다는 일본 각의 결정을 통보했다. 이를 담보하기 위해 병합조약 제3조에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 및 후예를 각기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조한다'라고 명문화했다.
◆병합 후 왕공족에 막대한 세비 지급
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되었고, 공표는 8월 25일에 하기로 양측이 합의했다. 그런데 대한제국 측에서 공표 날짜를 8월 29일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한제국의 망국 과정을 추적하여 기록으로 남긴 중국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합병조약은 8월 16일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의 논의 결정을 거쳤고, 17일 데라우치가 그 결과를 일본 정부에 전보로 통지했다. 25일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갑자기 그달 28일 한국 황제(순종) 즉위 4주년 기념회를 열어 축하한 뒤 발표하기를 청하자, 일본인들이 허락했다.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에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약속대로 고종과 직계가족 4명(순종과 순종비 윤 씨, 고종과 황태자 이은)을 왕족(王族)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황제의 방계가족(순종의 동생 의친왕과 부인 김 씨,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희)을 공족(公族)으로 삼아 조선 왕공족을 구성하고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수용했다.
일본이 조선 왕공족에게 제공한 세비는 1911~1920년까지는 연간 150만 엔(약 300억 원), 1921년부터는 연간 180만 엔이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연간 예산이 5,047만 엔이었다. 총독부는 예산의 2.9%를 조선 왕공족의 안락한 은퇴 생활을 위해 지출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또 병합 기념 명목으로 임시 은사공채 3,000만 엔(미화 1,500만 달러, 한화로 약 6,000억 원)을 조선에 기부 형식으로 제공했다. 그렇다면 은사금 3,000만 엔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조선 귀족제 창설로 반발 무마
일본 정부는 1910년 10월 7일, 대한제국 황실의 친족 및 각료에 대한 예우를 위해 조선 귀족제도를 창설하고 76명에게 작위를 주고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보장했다. 병합에 협조하여 귀족 작위를 받은 황실 친족 및 구한국 관리(3,683명)들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다.
귀족 중에서 최고액의 은사금 수령자는 흥선대원군의 장남(고종의 친형) 이재면으로 83만 엔(약 166억 원)을 받았고, 그의 아들 이준용도 16만 3,000엔(약 32억 6,000만 원)을 챙겼다.
유림이 병합에 반발할 조짐을 보이자 덕망 있고 나이 든 양반 유생(3,150명)에게도 은사금이 제공되었다. 타의 모범이 된 효자와 절부(3,290명), 빈궁한 홀아비·과부·고아·독신자(7만 902명)에게도 은사금이 뿌려졌다. 남은 금액은 실업자와 빈곤자 구제, 조선인 교육, 그리고 흉년 대비 자금으로 분배되었다.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 병합』의 저자 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는 병합 과정에서 "그 어떤 말썽이나 곤란한 상황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 맥을 빠지게 할 정도로 극히 평정한 상태에서 무사히 종료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고종과 순종은 일족에 대한 신분 보장 및 금전을 대가로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겼다. 대신들도 귀족 작위 및 거액의 은사금에 현혹되어 저항하지 않았으며, 유림과 백성들도 은사금을 받고 입을 닫았다. 이것이 일본이 "군인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합을 달성한 진짜 이유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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