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정치적 올바름(PC)은 위선(僞善)

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한국정부학회장)

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트리니티칼리지가 도서관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이 대학 동문으로 저명한 철학자였던 버클리(Berkeley)가 노예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로드 아일랜드에서 노예들을 부려서 농장을 운영했다. 농장에서 번 돈으로 학교를 열고, 인디언 아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계획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버클리는 농장과 노예들을 예일대학교에 넘기고 미국을 떠났다. 노예제 폐지 130년 전 일이다.

트리니티칼리지 내 예배당에 버클리를 기념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다. 대학이 창문을 뜯어내지는 않았다. 대신 창문 밑에 버클리에 대한 논란을 적기로 했다. 이는 '유지하고 설명하기'(Retain and Explain)이다. '유지하고 설명하기'는 '병 주고 약 주기'이다. 미국 버지니아대학교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학생들이 대학 내 제퍼슨(Jefferson) 동상 철거를 요구했다. 이 대학 설립자이자 미국 3대 대통령인 그가 평생 노예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예제 폐지 40년 전에 죽었다. 대학은 철거하는 대신 동상 밑에 제퍼슨 관련 논란을 적겠다고 한다.

두 사례는 '정치적 올바름'의 대학 버전(version)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자(minority)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한 언어나 정책을 의미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념이 확장됐다. 소수자를 차별, 모욕하는 말이나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지적질'이 시작됐다. 죽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비판은 더 가혹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버클리와 제퍼슨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노예로 삼았다. 그들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다. 올바른 사람만이 타(他)의 모범이 될 수 있다. 도서관 이름에서 버클리를 빼고, 제퍼슨 동상은 철거해야 한다. 이른바 '깨어 있는'(woke)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로 사자(死者)를 평가하는 것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일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문학, 미술, 음악으로 번지고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에서 '오리엔탈' '집시' '네이티브'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그녀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원제(原題)는 '열 명의 흑인 소년'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아이들에게 포르노를 보여줬다고 학부모들이 항의했다.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정물화만 보여줘야 하나. 대구시립예술단은 '베토벤 교향곡 9번' 공연을 취소했다. 가사 중에서 '신' '창조주' '천사' '천국'이 문제가 됐다. 기독교 편향이라는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곡도 연주가 금지될지 모른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이다.

'성 인지 감수성'도 유행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성 인지 감수성'은 성별 차이로 인한 일상생활 속 차별을 인지하는 것이다. 개념이 모호하니 말이 어렵다. 한 교수가 '성 인지 감수성'을 수업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내가 질문했다. "수업 중에 여자나 남자를 예로 드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을 예로 들지 마시고 무생물을 예로 드세요." 무생물을 예로 들 때도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된다. 자연 계열 교수가 탄소를 설명하다가 다이아몬드를 예로 들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다음 말이 문제가 됐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다이아몬드는…" 한 여학생이 교수에게 항의했다. "교수님, 다이아몬드는 남자들도 좋아합니다. 사과하시죠." 그 교수는 사과했다.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말과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지고(至高)의 가치는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유가 억압된다. 양심, 사상, 종교, 언론의 자유는 소수자 보호만큼 중요하다.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지나치면 탈이 난다. 영화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가 초능력을 터뜨리는 장면이 동성애자의 아우팅(Outing)을 의미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너무 멀리 갔다. 너무 멀리 가면 못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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