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형의 초상화를 그린 유일한 조선시대 작품이다. 형제는 서울 인왕산 아래 살았던 함안 조씨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숙종-영조시대에 벼슬한 관인(官人)이다. 형은 대과에 급제해 도승지, 경상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등 고위직을 지냈고 동생은 소과에 그쳐 봉사, 직장, 주부, 좌랑 등 중하위 내직과 현감, 군수 등 외직을 지냈다.
형 조영복은 글씨를 잘 썼고 동생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그림을 잘 그렸다. 형제는 부모를 일찍 잃었다. 조영석이 10대 초일 때였으므로 14년 위인 큰형은 아버지 같은 형이었다. 조영석은 형의 초상화를 그리고 "이지당(二知堂) 조공(趙公) 화상(畵像)"으로 표제를 쓰고 아울러 그리게 된 사연도 밝혀 놓았다.
조영석은 1724년(경종 4) 형님이 유배가 있던 영춘(단양)으로 찾아가 형님을 앉혀 놓고 사생해서 초본을 그려 놓았다가 이듬해 이 초상화를 완성했다. 당쟁이 심하던 때라 장차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카들이 제사 때 모실 형님의 모습을 그려 놓으려했던 것이다. 마침 동생이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형이 죄인의 몸인 상황이었지만 형님을 만나러 가서 살짝 그려올 수 있었다. 조영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배가 풀리고 복직되어 승진까지 한다.
'조영복 초상'은 '사심(寫心)'에 성공한 작품으로 당시부터 유명했다. 조영석의 그림 실력에 더해 형의 속내를 이해하는 동생이었기 때문이리라. 조영복을 잘 알고 있었던 조정 대신들과 영조는 이 작품을 구경했다. 자신이나 부모의 훌륭한 초상화를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바람이다.
영조는 1748년(영조 24) 아버지 숙종의 어진을 모사하게 되었을 때 조영석을 다시 불렀고 붓을 잡고 그려주기를 원했지만 조영석은 화원들의 감독하는 감화(監畵)를 맡았을 뿐이다. 사대부인 자신이 천한 재주로 윗사람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림 재능은 천기(賤技)로 업신여김을 받던 시대였다. 조영석은 13년 전에도 세조어진 모사에 불려 왔으나 같은 이유로 거부했고 그 때는 하옥되고 파직되는 곤욕을 겪었다. 영조도 조영석을 어쩌지 못했다.
낯빛이 짙은 색조이고, 또렷한 눈동자는 약간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며, 힘주어 꾹 다문 입은 좀 침울한 기색이다. 양손을 무릎 위에 놓은 자세도 자연스러워 조영석의 사실적이면서 품위 있는 그림 실력이 실감 난다.
가슴께에 맨 도포 띠에 부채를 매달아 휴대한 차림새다. 빨간 띠에 매단 노란 부채집에 손때 묻은 부채가 들어 있다. 요즘 부채 대신 활용하는 '손풍기'를 목걸이 메달처럼 목에 걸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인 모습이다. 19세기가 되면 부채는 소맷자락으로 들어간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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