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포퓰리즘에 곪아 가는 의료 현장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대구 A병원 원장은 응급의료와 외과 분야의 척박한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거의 매일 자정을 넘기고, 밤새워 응급환자를 수술하는 경우도 있다. 응급 의료진에겐 '워라밸'은 꿈도 꿀 수 없다. 검사비보다 낮게 책정된 수술비, 수술 방법·수술 재료까지 통제받는 상황에서는 의사 수를 늘려도 외과 분야를 지원할 의사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A병원은 절단된 신체의 미세접합수술로 유명하다. 이 병원에는 미세접합술을 배우려는 의사들이 많았지만, 몇 년 새 지원자가 크게 줄었다. 의료 담당 기자를 할 때, A병원 원장과 가끔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중 원장이 응급환자가 생겼다며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갔던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 '의사는 사명감 없으면 힘들고, 외로운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3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운영난을 이유로 소아청소년과 폐과(閉科)를 선언했다. 이 단체는 "현재 상태로는 소아과 병·의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다. 지난 10년간 소아과 의사들의 수입이 25% 감소했다"고 밝혔다. 진료 중인 소아과의 문을 당장 닫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아과 회원을 위해 다른 진료 과목 교육센터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탈(脫)소아과' 확산이 우려된다.

산부인과, 외과 등의 전문의가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의 진료를 하는 게 낯설지 않다. 위험 부담은 높은데 수익성이 낮기 때문이다. 의료법상 의사에게 진료 과목 제한은 없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수술법을 배워 모발 이식을 하는 의원을 개원하기도 한다. 흉부외과 전문의가 미용 시술을 하고, 외과 전문의가 감기 환자를 진료한다. 전국 의원급 의료기관의 상근 전문의 4만5천314명의 표시 과목(의원 명칭 및 간판)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28.4%가 원래 전공 과목과 다르다.

우리나라 의료, 겉은 멀쩡해 보이나 속은 곪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세계의 부러움을 사지만 앞날이 걱정이다. 허술한 응급의료 체계, 필수 전문 분야 기피, 과잉 진료, 닥터 쇼핑, 비급여 의료행위 급증…. 잘못된 의료 정책이 낳은 결과다. 국가는 의사에게 적정 수가를 보장하지 못하니, 알아서 돈벌이를 하라는 식이다. 의사는 국가를 원망하고, 국민은 의사를 불신한다. 근본 원인은 '포퓰리즘 의료 정책'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선심성 의료 정책을 남발했다. 반면 필수 의료·응급의료 지원에는 인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재인 케어'다. 문재인 정부는 '보장성 강화'를 내세워 상급 병실료, 선택진료비를 없애고 복부초음파, 뇌 MRI 등을 전면 급여화(건강보험 적용)했다. 그 결과 MRI·초음파 등의 검사비가 2018년 1천891억 원에서 2021년 1조8천476억 원으로 10배 늘었다. 선택진료비 폐지로 대학병원 환자 쏠림이 심해졌다.

'문재인 케어'는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켰다. 이는 건보료 인상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 당시 1%대 안팎이던 연간 건보료 인상률은 문 정부 들어 1.89~3.49%로 뛰었다. 윤석열 정부는 과잉 진료와 건보 재정 손실의 요인으로 '문재인 케어'를 지목했다. 그래서 MRI·초음파의 급여 기준을 재검토하는 등 구조 개혁에 착수했다. 의료 정책은 포퓰리즘 유혹에 취약하다. 선거철이면 선심성 공약이 난무한다. 지난 대선 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탈모 치료 건보 적용' 공약을 발표했다가, '모(毛)퓰리즘'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윤 정부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지향한다. 부디, 그 원칙이 의료 분야에서도 지켜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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