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로제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각막, 장기, 모금약정서를 접수하세요'
연극평론가모임의 '문화다양성으로 연극읽기' 로 관람한 작품은 연극과 드라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 고수희의 창단 작품으로 <접수> (작, 베츠야쿠 미노루 別役実, 나온시어터, 5,18~21까지)였다. 일요일 3시 마지막 공연에는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이은경 회장, 우수진, 배선애 평론가와 '문화 다양성으로 연극읽기'취지를 살리기 위해 공연 후 재밌는 테이블 토론도 이어졌다. 문화 다양성인 만큼, 일본희곡 작품을 보자는데 이견(異見)은 없었다. 방송, 영화, 무대에서는 배우로 더 잘 알려진 고수희는 극단 골목길 <청춘예찬>, <경숙이 경숙아버지>,<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와 <옥상 밭 고추는 왜>,<돼지우리> 정의신 연출 <야키니쿠 드래곤>과 수 많은 작품을 통해 감각적인 인물의 몰입감으로 캐릭터들을 살아있는 연기로 표현해 왔다. 고수희는 정의신 작품 <야키니쿠 드래곤>를 하며 익힌 일본어 실력으로 이번 작품을 번역하면서 활동명도 '나옥희'로 작품을 연출했다. 극단 '58번국도'가 특이하다. 한국국도 지명(地名)이 아니라 가장 길다고 알려진 일본 오키나와 국도인데 879,6Km 중 609,5Km가 바다로 되어있다. 국도를 타고 가면 바다 위 섬들을 이어준다. 고수희는 세계에서 가장 길면서도 육지와 섬, 바다를 잇고 있는 58번 국도 처럼 '무대를 통해 연기자와 연출가, 관객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싶다는 것'이 창단 취지이다. 일본희곡을 많이 접한 그는 극단을 통해 일본희곡을 탐구하고 공연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 신경클리닉 한 남자의 접수 방법
작품은 1980년도에 일본에서 초연한 단막극(60분)이다. 블랙 코미디적이면서도 부조리한 작품이다. 고수희(나옥희) 연출이 창단 작품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 공연을 보기 전에는 의외였는데 반세기가 가까워도 작가가 향하는 메시지는 오늘의 이야기다. 출산, 전쟁과 기아, 난민, 각막과 시체기증 등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인간의 존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 '실존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부조리함으로 작품구성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다. 세계 2차대전 시기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피부로 겪어온 작가의 80년대 세상은 버블경제 한파가 닥치기 전이였다. 일본은 그야말로 전자, 자동차로 '메이드 인 재팬' 브랜드가 세계 경제를 쥐고 있을 때였다. 부동산은 일본경제의 허리가 되었고, 엔화가 강세였던 시기였다. 살만했고, 출산율도 올랐다. 그런데 주변국은 달랐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캄보디아와 베트남 내전의 전쟁으로 수많은 시체가 넘쳐났고 기아난민의 비명(悲鳴)이 세계로 전파를 탈 때였다. 반대로, 전쟁을 딛고 초고도사회로 경제 대국의 몸집을 키워온 국민은 오히려 현대사회의 강박증과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베츠야쿠 미노루( 別役実)의 <접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극중인물 남자(홍수민 분)가 한 상가 건물에 위치한 신경정신과(요시다 클리닉)에 찾아와 진료를 접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대는 병원 내부 보이는 공간과 의자 몇 개, 접수대와 사무용품, '접수'팻말이 보이고 방문환자 진료 접수를 받는 여자(간호사, 최유리 분)와 남자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불면증 치료로 찾아온 남자한테 여자는 연필꽂이 위치를 놓고 시비부터 건다. 여자아이 네 명을 있다는 말에"세계의 식량 사정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세요?"라고 딴지를 걸면서 극은 부조리하게 흘러간다. 여자는 캄보디아 '이십구만삼천육백구십이명'의 어린이들이 아사 직전 굶주리고 있다며 콩고 아이들 사진을 불쑥 꺼내고 이들을 위해 모금 기부에 약정하라며 접수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한다. 여자가 같은 빌딩 사무실로 전화를 건 곳은 팔레스타인 난민원조 협회이고 얼떨결에 기부 약정한 남자는 '캄보디아 아가 아니였냐'고 따져 묻는다. 여자는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굶주리고 있다고 받아친다. 두 사람의 부조리한 대화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여자가 접수를 제안한 곳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NGO 활동 난민 기부, 각막 환자를 위한 이식 합의, 불치병에 시달리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장기기부 약속 등 여자가 제안한 접수는 같은 빌딩 여자 교환원이 상주해 있는 36개의 접수처다. 여자는" 이 건물에는 36개의 접수가 있고 36명의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남자는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한 접수보다는 자신이 접수되고 있는 곳은 다른 세계임을 직감하게 된다.
◆ 연극 <접수> 부조리한 세계, 그 경계의 시선
여자가 남자를 향해 접수를 제안하고 있는 곳은 전쟁과 난민, 죽음과 병으로 시달리고 있는 세계다.경제 대국 일본과는 다른 팔레스타인, 콩고, 캄보디아와 질병과 고통으로 쓰러져 가는 국가이며 다른 세계이다. <접수>는 전쟁과 질병으로 세계에서 소외되고 있는 국가와 인간의 경계에 있다. 남자 너머로 있는 보이지 않는 접수의 세계는 일본경제보다 더욱 참혹한 현실과 삶들이 펼쳐지는 지옥 같은 세계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연필꽂이 위치로 남자한테 시비를 건 이유도 돌아보면 결국 소외된 삶과 세상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개인의 질병만을 고치려고 하는 인간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시선을 바로 잡으려는 여자는 방문한 남자를 36개의 접수처에 가입시키면서라도 한 인간이 바라보지 않는 세계와 접수를 시키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남자의 불면증과 스트레스는 36개의 접수가 끝나야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여전히 반세기가 지난 작품이면서도 작가가 향하는 지점은 여전히 진행 중인 세계(世界)이다.
마지막 장면은 남자로 분한 인물이 '요시다클리닉' 의사로 등장하고 손님(환자) 소리가 들렸다는 말에 여자는 " 방을 착각한 것 같아요. 안락사 협회에는 어떻게 가냐고.."의사는 세상을 향해 부조리한 일침을 가한다. " 모두가 상당한 노이로제에 걸려있어. 자신은 그렇게 생각 안하고 있는 녀석이 많아.(중략) 그 녀석들에게 너는 노이로제야 라고. 어떻게 해서든 알아차리게 해줄 방법이 없을까."연극은 끝나는 마지막까지 부조리한 세계처럼,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도 부조리하다.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전쟁과 질병과 난민, 가난으로 허덕이는 국가들을 향해 마음의 <접수>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대화와 대사만으로 블랙 코미적으로 엮고 인간이 느낄 수 없는 낯선 세상을 부조리함으로 연결하고 있는 극의 구조가 어려울 수 있음에도 두 배우가 끌고 가는 60분이 의미가 있었다. 배우 고수희에서 번역, 연출 데뷔 '접수처' 앞에 서 있는 나옥희의 이번 공연은 극단 58번 국도 지속가능성의 데뷔전을 치렀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고수희는 극단을 창단하면서 일본의 현대희곡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던 중 '베츠야쿠 미노루' 다양한 희곡을 읽어보면서 작품이 주는 동시대성에 매력을 느껴 연출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연출은 " 앞으로 현대 일본의 연극과 희곡을 소개하며 한일 연극 교류 및 문화교류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극단 '58번 국도'는 연극과 방송영화에서 활동하고 배우 고수희가 연출가 나옥희로 데뷔전을 치르면서 연극 현장에서 함께 해온 배우들이 모여 연극 <접수>로 창단공연을 했다. 앞으로는 희곡의 본질과 연극의 보편성을 기본으로 동양연극의 사회문화적 특색을 발견하는데 주력하고 동시대적 사회현상을 담고 있는 일본 희곡을 탐구해 공연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고수희가 배우 출신이고 배우의 역할과 훈련을 누구보다도 직감하고 있는 나옥희는 앞으로 체계적인 화술 훈련을 통해 감각적인 대사 전달과 자연스러운 연기훈련을 통한 무대를 지향하고 있다. 부부가 연극배우다. 남편은 대학로에서 '산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배우 이근희로 '동랑청소년극단'을 거쳐 1981년 극단 '창고극장' 연극무대에 데뷔 한 후 연극과 방송 영화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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