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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02> 손으로 하는 말 없는 대화

미술사 연구자

백은배(1820-?),
백은배(1820-?), '바둑 두기', 종이에 담채, 25.4×2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에 활동한 화원화가 임당 백은배의 '바둑 두기'다. '임당(琳塘)'으로 서명하고 '백은배인(白殷培印)'을 찍었다. 담뱃대 물고 부채 든 듬직한 심판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대국 중이다. 배경 없이 인물과 사건만 그리는 김홍도풍 풍속화다. 얼굴과 손에는 화사한 살색을 올렸고, 옷 주름에 옅은 먹색과 푸른 담채를 덧대어 몸동작이 실감난다.

왼쪽 인물이 바둑판을 노려보며 막 착수하려는 참이다. 검지와 중지만 뻗어 그 사이에 흑돌을 끼운 모양새는 19세기에도 이렇게 바둑돌을 쥐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문가의 손놀림에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오른쪽 인물은 통 속의 돌을 만지작거리며 판세를 읽는 중이다. 심판은 망건에 상투관을 썼고 흑돌은 사방관을 썼다. 백돌은 탕건을 썼는데 귀 위로 은색 관자도 보이고 이마 위쪽으로는 반달형 노란 풍잠도 보인다. 당시의 차림새를 골고루 구경시켜주는 재미도 풍속화의 구성요소다.

바둑 두는 장면은 탈속적 초연함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 또는 사호위기도(四皓圍碁圖)로 부르는 고사인물화는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상산에 은거한 네 명의 노인을 바둑 두는 모습으로 그린다. 우리나라 풍속화로는 심정주의 '누상위기도(樓上圍碁圖)' 조영석의 '현이도(賢已圖)'가 이른 시기 그림이다. 바둑을 고상한 소일거리로 여겨 손으로 하는 말 없는 대화라는 뜻에서 수담(手談)이라고 했고, 바둑 두는 일을 좌은(坐隱)이라고 했다.

화가 중에서 고수(高手)는 최북이다. 서평군 이요와 내기바둑을 두다 한 수 물러달라고 하자 바둑판을 엎어버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북은 시서화를 다 잘했지만 중인인 그가 왕족을 비롯해 일류 양반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배경은 바둑 실력이었다.

근대기에는 대구의 서화가 서병오가 국수(國手)였다. 한 신문에서 선정한 전국의 최고 기가(棋家) 15명 중 4번째로 꼽혔다(중외일보 1926년 12월 5일자). 서병오는 10대의 나이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총애를 받아 운현궁을 드나들며 바둑, 장기로 노소동락했다. 이하응의 장기는 국박(國博) 수준이었다고 한다.

바둑은 동아시아의 유서 깊은 고급 오락이다. 중국에서는 요순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바둑을 즐겼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당나라 때부터 상류사회의 교양을 금기서화(琴棋書畵) 곧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이라고 했다.

"거문고로 성정을 기르고, 바둑으로 덕을 기른다"는 "금이양성(琴以養性) 기이양덕(碁以養德)"이라는 말이 있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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