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고도(孤島) 독도에서 발생한 일대 불상사인 세칭 독도사건은 아직도 세인의 기억에 새로운 바 있거니와 요번 동사건 2주년을 맞이해 경상북도에서는 당시 어민의 명복을 빌며 그 유가족들을 위문하는 한편 독도 영유 문제에 일본이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차제에 동도(同島)가 우리 영토임을 재천명하는 견지에서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하게 되었는데~'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6월 3일 자)
독도에 조난 어민위령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8년 6월 8일에 이른바 독도사건이 일어났다. 독도 인근 바다는 물고기가 알을 낳고 먹이를 찾기 위해 계절 따라 떼 지어 헤엄쳐 다니는 길목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다 보니 울릉도뿐만 아니라 울진의 죽변이나 강원도 묵호 어민들의 단골 어장이었다. 이들은 돛단배나 모터를 단 발동선을 타고 해산물을 채취하고 고기를 잡으러 왔다.
독도사건이 일어난 그날도 똑같은 일상이었다. 독도 바다의 물결은 잔잔했다. 강원도서 온 10여 척의 어선들이 이미 조업 중이었다. 울릉도서 출발한 어선이 합류하면서 수십 척으로 늘었다. 느지막한 시간에 아점 삼아 허기를 채우고 미역채취 등으로 여념이 없을 즈음에 폭격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비행기는 낮은 고도로 날며 총격을 가하고 포탄을 떨어뜨렸다. 어민들은 몸을 피할 틈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어민들은 처음에 독도 침탈을 노리는 일본 비행기가 총격을 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격기는 일본서 날아온 미군 전투기였다. 고도가 낮아 눈으로 미군 비행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군 비행기들의 사격은 이전에도 이따금 있었다. 하지만 이날처럼 어선을 향한 무차별 총격은 처음이었다. 미군은 어선을 바위로 잘못 보고 연습 사격으로 폭격했다고 뒤늦게 해명했다.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14명의 어민이 목숨을 잃었고 6명은 크게 다친 것으로 드러났다. 선박은 4척이 부서졌다. 이들은 항해 중에 재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폭격당했다. 미군 비행기가 총격을 가할 당시 18척의 배에 59명이 각기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망과 실종자는 이보다 더 많고 침몰 선박도 수십 척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뒤따른 수습을 보면서 어민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약소 민족의 비애라고 탄식했다. 애초 미군은 잘못을 인정하는데 미적거렸고 참사 희생자의 수습에도 느림보 행보를 보였다. 사상자의 배상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사망자와 부상자, 어선 파괴에 따른 명확한 기준이 없어 배상액이 뒤죽박죽이었다. 우리의 군이나 행정당국은 미군을 상대로 당당한 협상을 펼칠 힘이 없었다. 참사가 일어나고 한 달 보름 만에 위령제를 지낸 데서 이를 가늠할 수 있다.
미군의 배상과는 상관없이 독도 참사는 동포애를 자극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구호금 모금이 줄을 이었다.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조차 버거운 천막촌의 아이들도 동참했다. 그만큼 독도 참사를 바라보는 동포들의 안타까움이 컸다. 남선경제신문은 위문본부를 설치해 모금 운동을 벌였다. 61여만 원의 위문금과 위문품을 모아 유가족 등에게 전달했다.(매일신문 2019년 6월 25일 자 기록여행) 위문품 중에는 약품 외에 대구능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다에 사라진 어민들의 원혼의 복을 빌고 사건 당일인 6월 8일을 기하여~기념비 건립의 제막식과 고혼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는 오늘 오전 10시 현지 독도에서 관민 다수 참석 아래 엄숙 성대히 거행되었다. 즉 이날 식은 오전 10시 기념비 건립을 마치고 이의 제막식에 이어 어민 위령에 들어가~'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6월 8일 자)
독도사건의 조사는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게다가 미군의 배상금마저 들쭉날쭉 하자 유족들은 분노했다. 당국은 유족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일이 시급했다. 경북도는 희생된 어민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를 참사가 일어난 지 이태 뒤에 세웠다. 위령비 건립의 또 다른 까닭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망언에 쐐기를 박으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위령비에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새긴 이유였다.
위령비 제막식은 1950년 6월 8일 오후 3시에 독도에서 열렸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경북도지사를 비롯해 유가족, 생존자, 도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극락왕생을 비는 승려의 독경과 해군 병사가 쏘아 올린 조포 소리에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날 제막식에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알리는 영상 제작을 위해 홍보관계자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유실됐다가 바닷속에서 반세기 만에 발견됐다. 위령비는 돌아왔어도 독도 참사의 진상은 다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독도를 넘보는 일본의 야욕은 되레 커졌다. 위령비를 세운 두 가지 이유가 무색해졌다. 그런데도 과거를 묻지 말란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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