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재건축 실향민’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고가(高架)로 달리는 대구도시철도 3호선을 타면, 곳곳의 재건축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을 헐고 메꾼 땅은 납작하다. 다리미로 다린 듯 팽팽하다. 그곳의 사람과 건물, 사연은 흔적조차 없다. 표정 없는 얼굴처럼.

대구 최초 민간 분양 아파트인 '동인시영아파트'(1969년 준공)가 사라졌다. 오는 10월쯤 그 자리에 새 아파트가 우뚝 선다. 동인아파트는 '나선형 경사로'로 유명했다. 연탄을 나르기 쉽도록 계단 대신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가 살던 동인아파트에 가끔 놀러갔다. 수세식 화장실은 호기심 천국이었다. 빙글빙글 뛰어다닌 경사로는 멋진 놀이터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그 공간은 소멸됐다.

도시 곳곳이 아파트 공사장이다. 재개발·재건축이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다. 기찻길 옆에도 아파트가 들어선다. 근대 건축물이 가득한 북성로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대구의 입주 예정 아파트 중 52%(1만8천900가구)가 재개발·재건축으로 공급되는 물량이다.

내가 살던 옛 동네(대현동)도 풍경이 달라졌다. 나의 옛집은 진즉에 아파트가 됐고, 재건축 바람은 파죽지세이다. 허름한 집들은 반반한 아파트가 된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여기에 살 수 없다. 헌 집 준다고 새 집을 주는 두꺼비는 없다. 원주민은 과거의 주민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웃을 잃는 노인들에겐 상실감이 크다. 사람들은 힘들 때 고향과 옛집을 찾는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내가 살던 고향'이 아니다. 도시인들은 점점 '재건축 실향민'이 되고 있다.

공간은 저마다 고유성이 있다. 공간은 생물이 아니나, 숨결이 배어 있다. 슬픔과 눈물이 무늬진 곳은 더 그렇다. 작고 오래된 건축물이 맥없이 소멸하고 있다. 현대 도시는 기억상실형 공간이다. 재개발과 재건축은 필요하다. 공동화(空洞化)된 도심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주거복지는 물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보태져야 한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