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1년이다. 지난해 딱 이맘때쯤 대구에서 소송 중인 재판에서 지면서 악의를 품은 남성이 상대편 변호사의 사무실에 불을 냈다. 가해자를 포함해 당시 사무실에 있던 6명의 직원이 귀한 목숨을 잃은 참사였다. 당시 사회부 소속이었던 기자는 유족 취재를 위해 희생자들이 안치된 장례식장을 전담했는데, 가족을 잃고 무너진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함께 무너졌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후에도 크고 작은 참사가 있었다. 대규모 인명피해가 난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포함된 대구 여성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자는 또 장례식장을 향했다.
일을 하며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지금 희생자의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을까.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참사 희생자의 유족은 이후 마음대로 웃지도 못한다고. 웃음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녀 혹은 부모를 잃고도 저렇게 웃어도 되느냐'는 이웃의 수군거림 때문에 말이다. 언론 생태계에 발을 내딛기 전 이 글을 봐서일까 늘 참사 취재 이후는 어떤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 따지고 보면 기자는, 아니 참사 후 대다수의 언론은 참사 그 당시의 이야기 또는 살아생전 희생자의 이야기에만 집중했지, 그 이후의 상처받은 삶들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
백수린 작가의 책 '눈부신 안부'를 꼽은 것도 이렇게라도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은 이유였다.
눈부신 안부의 책장을 펼치면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성실히 거짓말을 해야 했던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의 이름은 이해미. 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를 한순간에 잃고, 엄마와 아빠는 언니를 잃은 고통에 힘겨워한다. 언니의 죽음으로 장녀가 된 해미는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고 막냇동생의 응석을 받아주며 혼자 슬픔을 삼켜낸다. 하지만 무너진 가족들의 삶은 좀처럼 회복되기 어렵다. 결국 아빠와 별거를 결정한 엄마를 따라 해미는 여동생과 함께 독일로 이주한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독일에서 개별 주체로 고유한 개성과 매력을 내뿜는 이웃들을 만나며 해미는 멈춰 있던 일상을 조금씩 재가동한다. 아이답게 점차 밝고 천진한 모습도 되찾아갔다. 하지만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외환위기와 함께 해미는 또 한 번 커다란 상실을 겪은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됐어도 해미는 여전히 유년의 비극에 붙들려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과 교류도 자제하며 지내던 해미는 그러다 어느날 미묘한 연애 감정을 주고받았던 대학동창 '우재'와 우연히 재회한다.
해미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우재로 해미는 점차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선다.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고 거대한 슬픔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여렸던 어린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눈부신 안부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마치 그 힘은 실재한다. 삶의 갖가지 비극으로 인해 멀어졌던 타인과의,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진심 어린 화해라는 쉽지 않은 일을 해나가기로 다짐한 인물들의 발걸음.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다.
유가족–숨 막힘을 숨 쉰다
지난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문화제에서 접했던 '유가족'이라는 시의 첫 마디다. 이보다 유가족의 상황을 잘 나타내는 구절이 있을까. 해미가 다시 살아내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희생자 가족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우리 모두는 해미가 독일에서 만났던 이웃, 우재가 돼야 한다. 슬픔의 이면에는 어떤 단단함도 있어서 신발을 꺾어 신고서라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316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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