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옛날 토종 과일의 맏물, 앵두나무

앵두나무
앵두나무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윤석중이 노랫말을 짓고 홍난파가 작곡한 동요 「달맞이」의 1절이다. 그해 처음 수확한 과일인 '앵두'를 따다 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걸고 달맞이 가는 배고프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앵두는 작지만 생김새가 복숭아와 닮았다.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를 닮았다'는 뜻의 '앵도'(鶯桃)에서 이름이 비롯됐다가 앵도(櫻桃)가 됐다. 국어사전에는 앵두나무로 나오지만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앵도나무'로 나온다. 대구수목원의 앵두나무 이름표에도 '앵도나무'이고 포털사이트의 일부에도 '앵도(櫻桃)나무'로 나온다.

앵두나무
앵두나무

◆토종 과일 중 가장 먼저 익는 앵두

비닐하우스 농사가 대세인 요즘엔 한겨울에도 딸기나 참외, 수박을 맛볼 수 있지만 옛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과일은 한정돼 있었다. 자연에 의존하는 재배 방법에다 저장하는 기술마저 발달하지 못해 여름에 수확하는 과일은 제철에만 맛을 보았다. 여러 가지 토종 과일 중 가장 먼저 익는 앵두는 단오가 되면 햇과일로 나온다. 새콤새콤한 맛은 입안을 개운하게 만든다.

열매의 크기에 비해 씨가 굵고 과육이 적은 탓에 오늘날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못 받지만 옛날에는 임금의 혼백을 모시는 제사상에 올릴 정도로 귀한 과일로 취급됐다. 조선 왕실에서 계절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곡식을 조상의 혼에게 올리는 의식을 천신(薦新)이라고 하는데 '세종실록' 오례나 '종묘의궤'에 앵두는 5월에 살구와 더불어 변(籩)이라는 제기에 담아 올렸다고 한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문종이 아버지 세종에 대한 효성을 다룬 일화에 앵두나무가 언급됐다. 세종은 육식을 좋아하고 활동을 싫어해 젊을 적부터 당뇨를 앓았다. 그런 세종이 앵두를 즐기므로 문종은 세자 시절 일찍이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바쳤다.

세종이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것이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고 하였다. 그런 영향인가, 지금도 궁궐 안에서 앵두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은 집 정원에 앵두나무를 한두 그루씩 심어두고 꽃과 열매를 완상했다.

앵두나무는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 중국 화북 지방과 만주가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부터 정원이나 집 주위에 관상용으로 심은 토종 과수다. 키가 크지 않고 땅에서 잔가지가 많이 나오는데 포기를 나눠 심어도 뿌리를 잘 내린다. 벚꽃이 질 무렵 3월 말에서 4월 초에 하얗고 작은 꽃이 가지에 소복하게 핀다. 열매 크기는 콩 만하며 6월 단오 무렵 겉이 빨갛고 반들반들하게 익는다.

앵두나무꽃
앵두나무꽃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시문선집(詩文選集)인 『동문선』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앵두를 보내준 임금께 올리는 감사의 글 「사앵도장」(謝櫻桃狀)이 실려 있다.

'엎드려 생각건대 삼춘(三春)의 아래서 비로소 여러 꽃다운 물건과 함께 지내고, 온갖 과일 가운데서 홀로 먼저 성숙됨을 자랑하며, 선로(仙露)가 점철(點綴)되어 진실로 봉새가 먹을 만하거니와 덕풍(德風)을 입었음에 어찌 꾀꼬리에게도 먹게 하오리까.

마침내 높은 가지에서 따내서, 그 아름다운 열매를 나누는데, 뜻밖에 말품(末品)을 받은 것도 역시 깊은 은혜를 입혀 주신 것이므로 받듦에 빛은 초평(楚萍)을 무색하게 하고, 입에 넣음에 맛은 소귤(蘇橘)보다 나으니, 어찌 반드시 적영(赤瑛·붉은 옥돌)의 소반 위에 쌓아 높을 뿐이겠습니까.'

늦어도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앵두가 들어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귀한 과일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고려 후기 문호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이나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시문집 『포은집』에도 앵두나무가 등장한다.

앵두
앵두

◆미인의 비유 '앵두 같은 입술'

'단순호치'(丹脣皓齒)라는 말은 옛사람들이 내건 미인의 조건이다.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를 꼽았다. 잘 익은 앵두의 빨간 빛깔은 관능적 매력을 느끼게 해서 앵순(櫻脣), 즉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은 대중가요나 시에 자주 나오는 말이다.

1978년 가수 최헌이 부른 가요 「앵두」의 후렴은 풋사랑의 아쉬움이 묻어난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영원히 잊지를 못해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 영화 「빨간 앵두」 시리즈는 선정성 때문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고, 이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되레 자극했다.

딸을 가진 여염집에선 앵두나무를 집 안에 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앵두꽃이 하얗게 피고 빨갛게 앵두가 익으면 처녀 마음은 싱숭생숭해져 바람나기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에 동네 우물가에 앵두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동네 우물가는 처녀들이 모여 물을 긷고 빨래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자리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앵두 같은 아가씨들이 모여 앵두 같은 입술'로 입방아를 찧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1950년대 후반 KBS 전속 가수 김정애의 최대 히트곡 「앵두나무 처녀」의 1절 가사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먹고살기 힘든 농촌에서 산들산들 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아가씨들이 춘정(春情)과 미지에 대한 동경으로 마을을 떠나는 시대상이 가사에 담겼다.

반면 앵두나무는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다. 앵두나무의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열리는 것에서 유래한 착상이다.

양앵두(체리)
양앵두(체리)

◆산에 자라는 형제 이스라지

우리나라의 야산에 가면 이스라지가 자란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산에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뜯어 먹게 했다. 그때 산에서 잘 익은 빨간 이스라지 열매를 따먹은 적이 있다. 약간 시큼하면서 떫은 맛도 난다. 앵두와 열매 모양이 거의 같다.

조선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이 지은 농업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 제2권 「종수」(種樹)에 '앵두는 자주 옮겨 다니기를 좋아하므로 이스랏(移徙樂)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이 저술한 의학서 『동의보감』에도 앵두를 이스랏이라 했고, 지금 이스라지[郁李]라고 부르는 작은 나무는 멧이스랏이라고 했다. 앵두와 이스라지의 열매가 거의 비슷하므로 옛날에는 자라는 곳만 다를 뿐 같은 나무로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양앵두가 많이 재배된다. 양앵두나무는 키가 거의 10m에 이르는 큰 나무다. 이름은 양앵두지만 나무나 열매 모양은 버찌에 가깝고 굵기는 몇 곱절이다.

새콤달콤한 앵두는 약주를 담그면 새빨갛게 우러나와 색이 보기에 곱다. 앵두주는 피로회복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는 앵두편(䭏·떡)을 만드는 방법이 나온다. '앵두를 끓는 물에 반쯤 익혀서 씨를 발라내고 잠깐 데친 후 체로 거른 뒤에 꿀과 졸여 섞고 엉기면 베어 쓴다'라고 했다.

이스라지(산앵두)
이스라지(산앵두)

◆'먹튀'의 순우리말 '앵두장수'

순우리말에 '앵두장수'가 있다. '앵두를 파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에는 '잘못을 저지르고 어디론지 자취를 감춘 사람을 이르는 말'로 풀이했다. 요즘 말로 사기 행각이나 돈을 떼먹고 줄행랑을 놓는 '먹튀'다.

임금이 한겨울에 앵두를 갑작스럽게 찾았다. 다급한 관리는 '앵두를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방을 붙였다. 때마침 한 장사꾼이 상에 눈이 멀어서 술로 담가 뒀던 앵두를 꺼내 물에 깨끗이 씻어 새것인 양 진상을 했고 큰 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장사꾼은 상을 받은 즉시 술 먹은 앵두라 들킬 것을 알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쳤다고 한다.

국회 활동보다 비트코인 투자에 진심이었던 젊은 정치인이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 대신 장기간 잠수 탄 뒤 국회에 슬그머니 나타난 모습을 보니 씁쓸하게도 '앵두장수'를 떠올리게 된다.

선임기자 chunghama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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