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께서 매년 현충일이면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충혼탑을 다녀 오신 후 그렇게 서럽게 우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렵사리 삼촌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전사자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희미한 기억만으로 한국전쟁 때 전사한 삼촌을 찾아 수년간 정부 부처를 다닌 끝에 돌아가신 지 72년 만에 무공훈장을 안겨줄 수 있게 된 김재문(71) 전 가톨릭상지대학교 부총장의 '눈물겨운 삼촌 찾기'가 현충일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5년 전 대학을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시니어일자리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올해 현충일은 잊지 못할 기념일이 됐다.
72년 전 한국전쟁 당시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실만 알고 지냈던 삼촌의 행방을 찾아, 국가로부터 명예를 인정받고 무공훈장을 추서 받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현충일 즈음이면 아버지께서 전쟁터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삼촌의 얘기를 하시면서 슬퍼하셨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동생이 나 대신 전쟁터에 나가서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말과 모습을 통해 삼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1979년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면서 삼촌에 대한 어떤 자료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학교를 퇴직하고 삼촌을 찾아 여기저기를 다니던 중 2020년 국방부 유해발굴조사단에 근무하던 지인에게 사연을 말하면서 본격적인 삼촌 찾기에 나섰다.
DNA를 채취해 등록하기 위해 보건소를 찾고, 이 과정에서 가족관계를 인정받아야 했지만 호적등본에는 삼촌이 없었다. 다행히 제적등본에는 삼촌이 표기돼 있었고, 비고란에 '1951년 4월 11일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전사'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다.
실마리는 여기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제적등본을 토대로 대전 현충원과 서울 현충원, 보훈처 등을 샅샅이 뒤졌다. 서울 현충원에서 전사한 날짜인 4월 11일 기록에서 삼촌 이름인 '김용섭'을 찾을 수 있었다. 군번도 함께 나왔다.
5월 19일 현장을 찾았다. 한국전쟁 때 사망한 전사자들이 안장된 52묘역은 그야말로 그 흔한 태극기, 꽃 한 송이 없을 정도였다. 전사한 지 72년, 자신이 태어난 지 1년 전 전사한 삼촌의 묘비 앞에서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김 전 부총장의 삼촌 김용섭 씨는 경북 김천 출생으로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0년 7월 14일 18세의 나이에 징집돼 5사단에 배속, 전투하던 중 1951년 4월 11일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는 우리 군이 백두산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3·8선 부근인 강원도 인제지역까지 내려왔다가 치열하게 접전을 벌인 곳이다. 김 전 부총장의 삼촌도 징집 9개월 만에 나라를 위해 싸웠고,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적군에게 둘러싸여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부총장의 노력으로 찾아낸 삼촌 김용섭 씨에게 국방부는 6·25 전사자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의 하나로 지난 3일 화랑무공훈장 수여를 결정했다. 화랑무공훈장 추서식은 안동시로 자료가 전달되는 대로 조만간 열릴 예정이다.
김재문 전 가톨릭상지대학교 부총장은 "국가가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25 전사자 3만6천명을 친인척들에게 하루빨리 찾아주길 소망했다"며 "당시 혈기왕성 하던 젊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는데, 지금이라도 이런 공을 생각해서 정부가 직접 전사자의 친인척을 찾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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