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하면 기성세대들은 '전설의 고향'을 떠올릴 게다. 하지만 이제 젊은 세대들에게 구미호는 드라마는 물론이고 웹툰, 웹소설 등의 '판타지' 캐릭터를 떠올린다. tvN 토일드라마 '구미호뎐1938'은 한국형 슈피히어로 판타지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드라마다.
◆구미호가 일제강점기에?
현재 살던 구미호가 일제강점기에 나타났다? tvN 토일드라마 '구미호뎐1938'의 이 발칙한 상상력은 여러 장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구미호가 등장했고 그것도 일제강점기로 시공간대로 떨어졌으니 판타지 장르일 테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은 다소간의 '국뽕'이 가미된 독립투사들을 그린 액션 스릴러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건, 마카로니웨스턴 장르를 그 시대배경으로 가져와 우리식으로 해석한 이른바 '만주웨스턴' 장르다. 우리에게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장르. 총을 쏘고 칼을 날리고, 말을 타고 열차를 추격하며 벌어지는 액션들이 이 드라마의 전반부를 꽉 채운다.
사실 2020년에 방영된 '구미호뎐'은 '나도, 너를, 기다렸어'라는 문구와 함께 구미호 이연(이동욱)과 그의 첫사랑인 남지아(조보아)가 키스를 할 듯 가까이 서로를 마주보는 포스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판타지 멜로가 전면에 내세워진 드라마였다. 물론 설화 속 존재들이 등장해 벌어지는 공포 가득한 스릴러와 그들과 대적해 싸우는 이연의 액션이 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중요했던 건 멜로다. 그런 점에서 구미호 역할의 이동욱에게 겹쳐 보이는 건 '아이언맨'이나 '도깨비' 같은 작품들이다.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가진 독특한 이미지를 가진 이동욱이어서 가능한 판타지적 존재와의 멜로랄까.
하지만 올해 '구미호뎐'의 시즌2에 해당하는 스토리의 연속성을 가진 채 등장한 '구미호뎐1938'은 멜로적 색채를 거의 지워버렸다. 물론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연의 순애보적인 면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보다는 어린 시절 함께 자라왔던 산신들인 홍주(김소연)와 무영(류경수)과 엮어진 우정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아끼는 친구들이었지만, 죽은 형을 다시 살리려는 무영이 홍백탈을 쓰고 삼도천의 수호석을 훔쳐 1938년으로 도망치고 그걸 되찾기 위해 이 시대로 넘어온 이연이 대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에 이연을 짝사랑하는 홍주와 홍주를 짝사랑하는 무영의 관계가 겹쳐지면서, 이들은 때론 서로를 돕고 때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로를 배신하는 묘한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러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마카로니웨스턴, 혹은 만주웨스턴 장르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들이다('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떠올려 보라). 즉 '구미호뎐1938'은 1938년이라는 일제강점기를 시공간으로 가져와 한국의 토속 설화의 존재들이 펼치는 판타지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전설의 고향'에서 진화한 캐릭터들
사실 구미호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방영됐던 KBS '전설의 고향'을 상징하는 설화적 존재였다. 여름밤이면 어김없이 돌아와 호롱불 앞에 어른거리는 섬뜩한 그 분장만으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봐야했던 공포의 대명사가 바로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였다. 그래서 '전설의 고향'이 종영한 후에도 구미호는 '구미호외전', '구미호: 여우누이뎐', '구가의 서' 같은 작품으로 재해석됐다. 시대에 따라 그 해석도 달라져 이제 구미호는 공포의 대상을 벗어나 능력을 가진 판타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간 떨어지는 동거' 같은 로맨틱 코미디가 그것이다. '구미호뎐'은 그래서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적 요소와 공포의 요소가 적절히 조합돼 나왔던 작품이었다. 흥미로운 건 '구미호뎐'에는 구미호만이 아니라 토종여우 구신주(황희), 반인반호 이랑(김범), 염라대왕의 누이 탈의파(김정난), 우렁각시 복혜자(김수진) 그리고 최강 빌런으로 등장하는 이무기(이태리) 같은 토착 설화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대거 작품 속에 들어왔다.
'구미호뎐1938'은 이러한 토착 설화의 요괴들이 더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토종진돗개 유재유(한건유), 늑대인 마적단 부두목(조달환), 인어 장여희(우현진)는 물론이고, 일본 설화에 나오는 일본요괴들도 대거 등장했다. 대장 사토리(서영주)가 이끄는 뉴도(정선철), 오오가마(이규호), 유키온나(김승화), 우시오치보(정재원) 4인이 함께 하는 시니가미 용병단, 이들의 상관인 텐구 가토 류헤이(하도권)나 사이토 아키라(임지호) 같은 일본 요괴들이 그들이다.
이처럼 토착 요괴들과 함께 일본 요괴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이 작품이 판타지물이지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일종의 토착 요괴들이 일본 요괴들을 상대로 벌이는 항일운동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판타지 액션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대결은 마치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최근 K콘텐츠가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과감하게 소재로 활용해 장르적으로 해석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국형 슈퍼히어로 판타지의 가능성
서구의 판타지 콘텐츠에는 토르나 로키, 오딘 같은 북구 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슈퍼히어로들이 있다. 또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 등에도 다양한 서구 신화 속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이미 종영한 '전설의 고향'은 어쩌면 한국 설화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보고였던 게 사실이다. 구미호부터 호녀, 깽이, 바리데기 등등 다양한 존재들이 이 레전드 드라마를 통해 소개됐으니 말이다. 또 설화 속 서사들도 다양해, "내 다리 내놔"로 유명한 '덕대골' 이야기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회자될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신기한 존재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설화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콘텐츠들이 이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유는 대부분의 이러한 신기한 이야기들이 공포물 같은 마이너한 장르로 치부되거나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VFX(시각특수효과) 기술이 발전해 비현실적인 상황들이나 존재들도 실감나게 그려내지만, 이런 기술이 일천했던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분장 정도에 의존하는 조악한 효과로 인해 이 마이너한 장르는 더더욱 마니아적인 장르가 되곤 했다. 최근 들어 '구미호뎐' 같은 작품이 '전설의 고향' 속 반가운 요괴들을 그저 공포의 존재만이 아닌 다양한 캐릭터로 그려지게 된 건 그래서 이걸 구현해내는 기술의 진화가 일조한 면이 있다. 김은숙 작가의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도깨비와 저승사자 같은 캐릭터들을 세련되고 멋진 존재로 그려냈던 것처럼, '구미호뎐'에 이어 '불가살' 같은 작품들도 토착 요괴들을 등장시켜 한국형 슈퍼히어로 판타지의 가능성을 넘보고 있다.
스타일리시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가져와 스토리에 녹여낸 '구미호뎐1938'은 그래서 서구의 경우처럼 우리도 한국형 슈퍼히어로 판타지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구미호를 중심으로 하나하나 매력적인 요괴 캐릭터들을 토착 설화에서 발굴해낸다면, 하나의 유니버스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구미호뎐1938'이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구미호를 비롯한 수리부엉이 홍주, 백두산 호랑이 무영 같은 토착 산신들을 되살리고, 조선의 얼을 말살하려는 일제와 맞서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건 마치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는 토종 설화를 되살리는 첫 단추로서 그걸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시도들과 맞서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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