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 ‘은’의 나라 아르헨티나, 나폴레옹 전쟁 덕에 독립하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는 콜럼버스 무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안에 있는 콜럼버스 무덤.'죽어서 스페인 땅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유언에 따라 레온, 카스띠야, 나라바, 아라곤 왕들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관을 땅에 내리지 않고 메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새벽에 들려오는 U-20 월드컵 축구 소식으로 금수강산이 들썩인다. 축구는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다.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다. 둥근 공 하나면 해변, 잔디밭, 맨땅... 어디서나 가능하다. 논두렁 축구도 있지 않은가. 부국들이 몰려 있는 서유럽, 오일 머니의 아랍, 아프리카 저개발 국가에 상관없이 사랑받는다. 다문화의 상징이다.

농구나 야구처럼 신체 조건에 크게 구애받지도 않는다. 축구의 신 메시만 해도 키가 170cm에 못미친다.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요즘 일상에 지친 사람들 마음에 청량감을 안긴다. 세계 축구팬을 놀라게 만든 한국팀의 맹활약 덕분이다. U-20 월드컵 축구 개최국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왜 그런지, 아르헨티나 탄생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알람브라 궁전. 스페인은 1492년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이슬람 세력을 모로코로 내쫓은 뒤, 알람함브라 궁전을 차지한다. 그해 8월 콜럼버스를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다.
알람브라 궁전. 스페인은 1492년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이슬람 세력을 모로코로 내쫓은 뒤, 알람함브라 궁전을 차지한다. 그해 8월 콜럼버스를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 콜럼버스 후원 아메리카 발견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으로 칭송되는 알람브라 궁전. 타레가의 그림같은 기타선율로 잘 알려진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에 자리한다. 알람브라 궁전 전망대에서 시가지를 조망하면 한가운데 우뚝 솟은 그라나다 대성당(Granada Cathedral)이 눈에 들어온다. 1523년 스페인 합스부르그 왕가의 절대왕정을 구축한 스페인판 태양왕 카를로스 1세 때 착공한 건축물이다.

엔리케 에가스, 디에고 데 실로에 등 여러 건축, 조각가의 손을 거쳐 181년만인 1704년 완공된다. 스페인 르네상스 건축의 상징과도 같다.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왕실 무덤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성당을 착공했다. 스페인 왕실은 성당 착공 54년 전인 1469년 카스틸라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태어났다. 이후 지리상의 탐험에 적극 나서 국력을 키운 스페인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려던 취지다.

알 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대성당. 이사벨라 여왕의 묘가 그라나다에 자리한다.
알 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대성당. 이사벨라 여왕의 묘가 그라나다에 자리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 필리페 2세는 생각이 달랐다. 왕실 묘지를 수도 마드리드 근교 엘 에스코리알로 옮겼다. 그라나다 대성당에는 종교 기능만 남았다. 왕실 묘지 기능은 대성당 바로 옆 왕실 예배당(Royal Chapel of Granada)에 살아남았다. 1505년부터 1517년 사이 건축된 왕실 예배당에 이사벨라 여왕과 남편 페르난도 2세가 잠들어 있다. 둘의 외손자 카를로스 1세가 이 옆에 더 크게 지은 왕실 묘지가 앞서 소개한 대성당이다.

이사벨라 여왕을 빼고 스페인 현대사를 논하기 어렵다. 1492년 초 그라나다에 거점을 둔 이슬람 왕조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냈다. 그해 8월 콜럼버스의 대항해를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위업을 이뤘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을 떠나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에 이른다. 이어 쿠바섬과 히스파니올라섬 아이티에 도착해 식민시를 만들었다.

◆콜럼버스로 시작되는 아메리카의 현대 역사

콜럼버스는 1492년 1차 탐험을 시작으로 1504년까지 모두 4차례 원정을 감행하고 식민화를 추진한다. 1492년-1493년의 1차 항해와 1493년-1496년의 2차 항해에서는 서인도제도의 섬들, 그러니까 쿠바가 자리한 쿠바섬,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자리한 히스파니올라섬, 푸에르토리코섬, 자메이카섬 등 만 다녀온다.

그러다 1498-1500년 3차 탐험 때 마침내 서인도 제도 섬들 아래 카리브해를 건너 남아메리카 대륙 트리니다드에 발을 내딛는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 유역이다. 현재 트리니다드토바고라는 나라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콜럼버스가 상륙한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 유역 전체를 당시는 트리니다드라고 불렀다.

이 무렵 1500년 포르투갈의 카브랄이 포르투갈의 2차 인도 탐험대로 출발했다가 풍랑에 떠밀려 우연히 남아메리카 중동부 리우데자네이로 지역에 표류한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세력권에 들어간 이유다. 콜럼버스는 1502년-1504년 4차 항해 때 오늘날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가느다란 목과 같은 지역, 파나마 지협(地峽)에도 상륙한다.

바르셀로나 콜럼버스탑과 동상.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시를 건설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바르셀로나 콜럼버스탑과 동상.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시를 건설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발보아 1510년 아메리카에 첫 유럽인 식민시 건설

이렇게 대륙에 처음 발을 내디딘 인물은 콜럼버스지만, 대륙에 처음 식민시를 건설한 인물은 스페인 탐험가 발보아다. 그는 25살이던 1500년 처음으로 서인도제도로 간다. 히스파니올라섬에 콜럼버스가 개척한 식민지에 정착하며 신대륙 탐험에 나선다. 10년 뒤, 1510년 콜럼비아에 식민시 산타 마리아 라 안티구아 델 다리엔(Darién)을 건설한다. 유럽인이 남북 아메리카를 합쳐 아메키라 대륙에 최초로 만든 식민시다.

발보아는 2년 뒤, 다리엔 총독으로 임명된다. 이후 1513년 콜럼비아 북쪽에 붙은 파나마로 간다. 콜럼버스가 13년 전 갔던 곳이다. 발보아는 콜럼버스보다 한 발 더 움직인다. 파나마 지협을 탐험하다 태평양을 본 것이다. 대서양과 다른 바다라는 것을 처음 확인한 인물이 발보아다.

태평양이라는 이름은 6년 뒤, 마젤란이 1519~1522년에 세계 일주를 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1510년 발보아의 첫 식민시 개설 이후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에 본격적으로 식민시를 세워 나간다. 1542년 스페인은 페루 부왕령(Viceroyalty of Peru)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날 페루 수도 리마를 중심으로 남아메리카 전역을 아우르는 식민지를 세운다.

◆ '은'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어

스페인 탐험가들이 남아메리카 동남부 아르헨티나로 처음 내려간 것은 1516년이다. 10년 뒤 1526년에도 스페인 탐험가가 찾았고, 마침내 1536년 멘도사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식민시를 건설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5년 뒤 1541년 문을 닫지만, 1553년부터 스페인의 여러 탐험가들이 아르헨티나 각지에 식민시를 추가로 설치한다. 1580년 재건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후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다.

'아르헨티나(Argentin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가 아니고, 이탈리아어다. '은'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럽인들이 아르헨티나에서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은(銀). 스페인은 아르헨티나 은광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다.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은 153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지도에 처음 등장한다.

콜럼버스(제노바 출신)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 이름의 기원이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피렌체 출신)도 이탈리아 사람인 점을 감안하면 대항해 시대 초기 이탈리아 출신 인물들의 활약상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만들지 못했을까? 당시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5월혁명'에서 이름을 따온 아르헨티나의 심장과 같은 곳인 오월광장과 대통령궁

◆나폴레옹의 침략 전생으로 아르헨티나 독립

화수분처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던 남아메리카 식민지에 변화가 찾아온다. 1789년 터진 프랑스 대혁명이다. 나폴레옹은 1795년 위기에 봉착한 혁명을 구한 뒤, 이를 빌미로 1804년 황제정을 만든다. 독재자가 된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유럽 국가에 내린다. 이를 어긴 포르투갈로 1807년 쳐들어간다. 포르투갈 브라간자 왕조 주앙 7세는 브라질로 도망간다.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에도 침략해 페르난도 7세를 내몰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에 앉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력에 금이 간다. 이 틈을 타 독립운동 지도자, 리베르타도레(Libertadore)들이 독립투쟁을 이끈다. 산 마르틴 장군을 중심으로 1810년 아르헨티나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아르헨티나 최대 국경일은 7월 9일 독립 기념일이다. 이후 내전을 거쳐 1853년 헌법을 만들고, 공화국을 출범시킨다. 비옥하고 광활한 국토를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구가한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반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 그 뒤, 선진국에서 밀려나 주저앉은 아르헨티나의 전철은 전 세계 많은 나라에 타산지석의 교훈을 안긴다.

역사저널리스트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