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동성로 축제가 열리는 대구백화점 광장에 오랜만에 가보았다. 대학 시절, 약속 장소는 항상 대백 정문 앞이었고, 사람에 떠밀리느라고 걷기도 힘들 정도로 붐비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구백화점은 폐점한지 오래고 철문이 닫힌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살아가면서 정든 것들과의 이별이 점점 많이 생기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 많은 사람들과 역사는 어디로 떠밀려갔는지, 우리의 만남과 인연조차도 점차 마이너스로 돌아서버리는 게 세월의 이치인가하는 을씨년스런 생각이 들었다. 쇠락해가는 대구에 대한 안타까움을 안고 있을 때, 대구인으로서 자존감이 살아나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검찰청과의 간담회 자리였다. 현직 검사장님이 대구 법조계의 변천사를 들려주셨다. 그 분은 말투로 보아 대구 사람은 아닌 듯한데, 대구 법조 근대사를 일목요연하게 친근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구 사람인 나보다 대구 골목길 구석구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눈에 본 듯이 설명하는 것은 대구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1895년에 중구 공평동에 대구재판소가 처음 개소되어, 1973년 지금의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전하기까지 중구 공평동은 대구법원의 터전이었고, 대구의 최고 중심지였다고 했다. 공평동이란 이름도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라는 뜻이라고 하니 새삼 의미있게 와 닿았다.
그 당시, 북성로에는 엘리베이터까지 딸린 호화로운 백화점까지 있었고, 대구시의 중심에 상점과 사람들로 넘쳐나고 법원까지 있었으니, 대구시 중구는 그야말로 대구의 근대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가 아니었겠는가. 이 이야기는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우리의 삶은 동성로처럼 변해가고, 대구백화점처럼 소멸해가고 또 어떤 모습으로 만나서 기쁨과 슬픔으로 얽히며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신천대로를 따라 유월의 줄장미 넝쿨이 농염한 자태를 한껏 드러낼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원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의원을 개원하여 지금까지 20여년간 몸이 아파서 입원한 것도 처음이고 일주일간 병원을 비운 것도 처음이었다. 가벼운 기침으로 시작된 감기가 결국 폐렴으로까지 번졌지만, 그래도 이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감기약 한두번 먹으면 끝날 것으로 여기다가 병을 키웠다. 앞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병실에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온갖 상념에 잠겼다.
집념과 노력으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온 거 같은데, 내 직업에서 목표를 이루면 그 후에는 인생이 편해지고 행복이 기다릴 거라는 기대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인연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에 모래알 빠져나가듯이 사라져 버렸고, 인생은 생로병사로 귀결된다지만 출발도 여정도 모두 어긋난 여행처럼, 늙은 몸을 추스르다가 떠난 것도 아니고, 마음은 청년 같은데, 시간들이 언제 그렇게 쪼개어져 나를 둘러싸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몸이 늙어가는 걸 몰랐고 거기에 따라 변해가며 적응해나갈 줄 몰랐던 나의 어리석음 탓이다.
긍정 심리학자인 탈 벤 샤하르(Ben-Shahar)는 도착 오류(arrival fallacy) 라고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던 목표에 도달했거나 의도한바대로 성취하고 나면, 이후에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목표로 하던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승진하고, 결혼만 하면, 임신만 하면 등 어떤 한 가지 사건으로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착각하며 사는데 이것을 도착 오류라고 한다.
도착해보니 잘못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영리한 사람들은 다시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고 달성하고 또 매진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성취의 기쁨은 잠시고 공허감과 다시 내리막을 타지 않을까 하는 압박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불안감은 우리 면역계를 약화시켜서 각종 질병이나 감염에 취약해지는 조건을 만든다. 내가 바로 이런 늪 같은 지경에 도달해서 나의 면역계와 외부 바이러스와의 한판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결과, 입원까지 한 게 아닌가.
가시적인 목표는 단기적이고 반복하다보면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 좀 더 멀리 삶의 방향성과 인생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 허무감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우리는 조급해서 그런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의대를 가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면, 좋은 의사가 되어 인술을 베풀겠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좀 다른 맥락 같지만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 우연히 남편이 첫사랑 여성과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보게 된 부인이 마음에 큰 병이 생겨서 내원하였다. 남편은 낯간지럽고 쑥스러우니 편지를 버리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 때문에 마음잡고 공부해서 의사까지 된 거 아니냐, 그러니 네가 지금 고생안하고 잘 살지...라고 변명했다가 부인의 마음에 결정적인 대못을 박았다.
이 중년 부부의 싸움을 들으면서 정말 사랑이란 무엇인가.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겪고 슬픈 추억을 간직한 연애 편지 같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가볍고 적막할까. 사랑한다면 곁에 있고 잔소리하고 지지고 볶고 토라지고 싸우면서도 편들어주고, 일생을 곁에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란 게 아닐까.
일상 속에서 육체는 남루해지고 가슴 뛰는 순간이 사라졌다고 해도 가장 소박하고 허기진 저녁 밥상에 마주 앉는 사람이 사랑이 아닐까. 이 말을 들려주어도 부인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열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른 땅에 씨앗을 뿌리고 자라나게 하려면 매일 물을 주고 돌봐야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가 병들지 않게 뇌신경세포가 촘촘하게 가지를 뻗어서 시냅스를 형성해가듯이, 의미 있는 사람들, 나의 곁에 머물었던 소중했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연결되고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 뇌와 마음이 건강해지는 길이다. 개인이나 장소나 역사는 돌보아주고 기억해주고 알아주는데서 생명력을 얻게 되고 반짝반짝 인연이 되어 건강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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