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구한말 양반 유생들의 의병 봉기를 숭고한 애국심과 반일 의식의 찬연한 금자탑으로 이해하고 있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언론이나 문학작품, 드라마에서도 그런 상식들을 확대 재생산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반 의병장들이 일으킨 봉기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신기루이자 환상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구한말 봉기한 항일 의병 중 가장 유명했던 유인석의 사례를 통해 그 내막을 들여다본다.
◆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신봉
유인석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직계인 이항로의 제자였다. 학파로는 화서학파요, 당색으로는 노론의 정통 도맥을 이어받은 위정척사의 적통 장자였다. 평생을 송시열의 우산 아래 살았다는 뜻이다.
유인석의 스승인 이항로는 중국의 성현 주자(朱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을 것이며, 주자의 지(旨)가 아니면 감히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자였다. 심지어 이항로는 성리학적 예의 질서를 모르는 서양인을 인류가 아니라 어패류로 인식했다. 그런 사고를 이어받은 수제자가 유인석이었으니 그는 당연히 중화(中華)를 수호하고, 누린내 진동하는 야만의 족속 서양과 일본(倭)을 오랑캐(夷)로 배척하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을 철저하게 신봉했다.
유인석은 자신이 지은 『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 일본과의 개항 및 수호 통상은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여 천하 망국의 근본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수구인(즉 위정척사론자)같이 행동했더라면 나라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망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 않았을 것(유인석 지음·서준교 외 역, 『의암 유인석의 사상: 우주문답』, 종로서적, 1984, 158쪽)이라고 외쳤다.
심지어 그는 공화제와 입헌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를 강력히 반대했고, 서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여학교·무관학교도 때려 부수자고 선동했다. 여성들이 학교에서 평등·자유 따위의 허무맹랑한 악설(惡說)을 배우면 서양처럼 남편을 학대하고, 시부모를 천대하며, 자녀도 망치게 되므로 여학교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발령에 극렬 저항한 이유
1895년 12월 30일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공포하여 을미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국왕 고종과 세자(후에 순종)가 상투를 잘랐고, 조정 대신을 비롯한 정부 소속원들이 단발을 했다. 12월 31일부터는 체두관(剃頭官)이 가위를 들고 서울 거리나 사대문, 사소문 등 도성을 출입하는 성문 등에서 길 가는 사람들의 상투를 잘랐다.
국왕과 정부 고위 대신들의 솔선수범에도 불구하고 선비·유생들은 "목이 잘리더라도 머리는 내놓을 수 없다"라면서 극렬 저항했다. 유인석은 단발령을 "상투를 자르는 즉시 인간은 짐승으로 변해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자 "소중화 문명을 짐승의 처지로 전락시키는 장례식"으로 인식했다. 그렇다면 유인석을 비롯한 조선 사람들이 단발령에 저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공자가 "인간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고, "중국에서 오랜 옛날부터 그보다 더 중요시한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투는 중국의 성인들이 조선 사람에게 전해준 '거룩한 중화 문명의 표상'이었다는 뜻이다.
상투를 잘린 사람들은 단발령을 소중화의 나라를 서양에 가져다 바치려는 왜놈들의 배후 조종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단발령에 대한 저항은 중화 문명 수호를 위해 서양(일본) 문명과 맞서 싸우는 주자성리학 십자군 운동이었다.
단발령으로 인한 소용돌이 한복판인 1896년 3월 16일, 유인석은 제천에서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으로 불리는 의병을 일으켜 총대장에 올랐다. 그가 의병 봉기를 한 이유를 밝힌 문건이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다. 이 문건에 의하면 유인석이 봉기한 이유는 '소중화 예의의 나라'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고 의복과 상투를 파괴하여 소중화 문명을 짐승 수준으로 타락시킨 일본과, 그에 앞장선 친일 개화파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유인석은 1896년 3월 29일 휘하 의병을 도열시킨 가운데 생포한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의 목을 잘랐다. 그들이 처형당한 죄목은 단발 강요죄와 의병 토벌죄 두 가지였다. 충주성을 점령하여 사기충천한 유인석 의병은 4월 28일, 가흥·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수비대 공격에 나섰다.
◆양반에게 대든 의병 선봉장 목을 친 유인석
전황이 불리해지자 선봉장 김백선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안승우는 병력 지원을 거절하는 바람에 패전하고 말았다. 귀환한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문제는 선봉장 김백선은 포수 출신의 상민이요, 중군장 안승우는 지체 높은 양반 신분이었다.
신분이 미천한 상놈 주제에 감히 양반에게 대들다니, 이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불경죄 아닌가. 의병장 유인석은 김백선을 체포하여 의병들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 호좌창의진 절충장군 김백선은 불경죄로 목이 잘려 분수처럼 피를 내뿜으며 죽었다. 김백선의 처형 후유증은 깊고 심각했다. 그를 따라 의병진에 합류했던 사격술 뛰어나고 조직력 강한 포수들의 대 이탈로 유인석 의병부대는 지리멸렬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양반 유생 의병장들은 나라의 주권 수호보다 반상의 신분 질서 고수가 우선이었다. 때문에 반상의 윤리와 법도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히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했다. 허망하게 무너진 유인석 의병의 행적을 분석해 보면 그가 의병 봉기를 통해 수호하고자 했던 것은 나라의 주권이나 백성의 생명과 재산이 아니라, 위정척사를 통한 '주자성리학의 도'였다.
이런 의병 투쟁을 한 유인석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보훈 관계자들은 혹시 봉건국가 조선과 자유민주 국가 대한민국을 혼동하여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닐까?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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