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그리기는 곧 반성적 사고하기

신경애 화가

신경애 화가
신경애 화가

컴퓨터는 새로고침이 있어서 좋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신통하게 새로고침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어떤 미술을 열심히 해왔는데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새로고침해야 한다. 사실 말은 쉬워도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자기 만족감도 세간의 별다른 성과도 없다고 하더라도 해온 게 아까워서 보통은 내려놓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새로고침할 수 있을까. 미술에서도 새로고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한다는 것이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노력이 재능을 만든다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무작정 아무거나 열심히 하면 되는 건 아니다. 즉 열심히 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술에서는 역시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게 있다는 그런 말 아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 열심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조금 냉혹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한 것을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 아마 모든 학문 분야, 모든 인간 삶에서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

듀이(J. Dewey)는 교육을 성장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성장은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듀이의 유명한 명제는 바로 '경험함으로써 앎(Learning by Experience)'이다. 그렇지만 뭐든지 경험하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를 그대로 미술에 적용하여 보면 미술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물론 미술에서 뭐가 가치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고스란히 그 결정은 화가에게 달려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건 가치 있고 어떤 건 가치 없다는 걸 분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긴 아니다. 듀이 경험론의 초점은 경험 그 자체 보다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다. 말하자면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경험, 그것을 그저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경험을 반성(reflective thinking)하는 게 중요하다. 반성하다(reflect)의 어근 'flect'는 라틴어 굽히다(flecto)에서 파생됐다. 유연한, 융통성 있는 이라는 뜻의 'flexible'도 여기서 유래한다. 즉 반성이란 다시(re) 굽힐 수 있는 유연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도 모르게 딱딱해진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이 화가에게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자기 스타일을 확립해야 하는 화가에게는 참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을 열심히 그리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열심히 그리든 화가마다 열심히 할 걸 정해놓고 묵묵히 그 일을 하고 있다. 화가에게는 정년이 없다. 화가만큼 오래 일하는 직업도 드물다. 언제 그만둘지를 화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70대 혹은 80대의 화가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발굴돼 조명을 받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다.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세계 경매시장에서 천문학적 숫자의 작품가로 주목받기도 한다. 그렇게 느지막하게 평가 받는 화가에게는 정년퇴임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에게 그 기회가 오든 안 오든지 어쨌든 만회할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화가의 일이 끝이 없어서 지옥이다. 그런 만큼 화가가 반성적 사고를 통해 새로고침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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