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어리석은 자들의 세기'는 2055년 급격히 진행된 기후변화가 지구를 초토화시킨 후 인간의 모든 업적이 보존된 북극의 아카이브에서 오늘의 자료 화면을 보며 묻는다.
"우리는 어째서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기후변화를 막지 않았던 것일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기후변화를 걱정하면서도 석유를 펑펑 쓰거나 마을에 풍력발전기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 미국식 삶의 방식은 낭비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아프리카인 등등 여러 삶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 답이 인류가 어리석거나 자기파괴적인 것과는 별 관계가 없고 모든 것이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지속 가능성은 이야기의 문제다.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보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야기는 우리 삶을 어린 시절부터 관통하여 흘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명체들, 나아가 만물을 바라보는 색안경이 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인 것이 소위 문화다. 인류는 문화 시스템에 배태되어 있고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제약을 받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삶의 현실 문화 내에서만 행동한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부분은 문화라 할 수 있다.
첫째, 오늘날 글로벌 문화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소비가 행복의 척도이고 무한 성장은 진보이며 자연은 착취와 억압의 대상임을 전제한다. 이 전제를 바꿔야 문화 시스템도 변할 수 있다. 육식은 이러한 전제에 깔린 논리의 상징이자 증상이다.
둘째, 과시적 소비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과 경제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경제학자 베블런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욕망이 생산 잉여를 촉발시켜 과시적 소비와 전반적 낭비가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의 결과, 선진국 부유한 계급의 관습이 사회 전체가 따르는 문화적 모델을 결정하고 이로 인해 모방적 경쟁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베블런은 욕구는 무한하지 않고 어느 수준부터는 사회적 장치들이 그 욕망을 자극한다고 통찰했다. 즉 생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소비의 이유와 법칙이야말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소비주의는 현대사회의 집단 의례이다. 식사·미디어·제도·직장·관습 등 자각하든 자각하지 않든 우리는 각종 의례로 가득찬 삶을 살아간다. 대다수는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인 이 의례를 통해 신성을 제거당하고 소비주의를 강화하며 잠재력을 억압당한다. 일상 속에서 평범한 의례들을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영적 도구, 즉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상기하는 의례로 대신해야 한다.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모든 종교의 식사 의례의 경건함을 현대적으로 살려냄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세대에서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는 생명 존중·생태계 보호·윤리적 소비의 비거니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육식의 탐닉은 과시적 소비뿐 아니라 그 심리적 범위가 성과 인종차별, 계급과 국가 정체성을 넘어 인간을 먹이사슬의 정점에 두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까지 깊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삶을 바꾸려면 마음을, 마음을 바꾸려면 음식을 바꿔야 한다. 음식을 통해 신성과 다시 연결하면 이는 세상을 바꾸는 힘의 근원이 된다. 기존 문화 규범을 재규정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이야기들을 다시 적으며 지속 가능한 세계관을 이끌고 있는 비거니즘에 언론의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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