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진시황본기에서 "동쪽으로 조선을 멸망시켰다"라고 말하지 않고 "진나라의 영토가 동쪽으로 동해와 조선에 이르렀다(地東至海曁朝鮮)"고 한 것은, 진나라의 동쪽 강역은 동해에 이르렀고 발해유역에는 조선이란 나라가 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문헌적 증거이다.
진시황시대에 고조선은 동북방의 동이족 독립 국가로서 중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금은 발해유역 하북성 북경시 일대가 중국의 수도지만 진시황시대에 이 지역은 동이족 고조선의 영토였다.
◆고조선, 고죽국 지역을 진황도시라는 이름으로 바꾼 잔꾀
1972년 하북성 고고연구소에서 노룡현 서남쪽 난하灤河 연안의 무덤을 비롯한 은왕조 후기의 문화유적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많은 청동기, 도기, 골각기,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하가점하층문화의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었는데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의 문화로 보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이는 발해유역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가 고조선의 유적지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근거가 된다.
'사기' 제태공세가에서는 오늘의 산동성에 있던 제齊나라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북쪽으로는 무체에 이르렀다(北至無棣)"라고 말했는데 '사기색은'에서 "무체는 요서의 고죽국에 있었다.(無棣 在遼西孤竹)"라고 주석하였다.
무체현은 현재 중국 지도상에 나와 있으며 산동성 최북단 빈주시濱州市 관할로 되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고죽국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있던 작은 나라로 여겨왔는데 무체현이 고죽국 영토라면 고죽국은 발해만의 서남쪽 산동성 북방까지 포함하는 강대한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중국학계에서는 고죽국을 춘추시대에 제환공이 멸망시킨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이는 문제가 있는 견해이다.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다급한 사정을 알렸고 제환공이 연나라를 구제하기 위해 산융을 공격했다. 그때의 상황을 '사기' 제태공세가 환공23년 조항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드디어 산융을 정벌하여 고죽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
이에 관한 기록은 '관자'와 '국어'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인 사실로 여겨진다. 다만 '사기'에서는 제환공이 "고죽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관자'와 '국어'에는 "고죽을 참하였다(斬孤竹)"라고 말하여 표현상에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고죽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라고 썼는데 '관자'나 '국어'에서는 "고죽을 참하였다"라고 쓴 것을 본다면 이때 제환공은 고죽국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힌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제환공이 고죽국을 멸망시킨 것으로 확대해석하는 바람에 춘추 전국시대 이후의 고죽국 지역이 모두 제나라와 연나라 땅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춘추시대에 연나라를 침략한 산융은 누구인가. 한족들의 고조선에 대한 별칭이라고 본다. 연나라 동쪽에서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나라가 고조선이고 또한 당시에 동북방에서 연나라를 공격하여 위기에 빠뜨릴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는 고조선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죽국은 고조선에 의해 통합
고죽국은 춘추시대에 제환공에 의해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산융 즉 고조선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본다.
서한 시대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한 다음 논공행상을 할 때 한나라에 협조한 조선인들에게 땅을 떼어주어 제후로 삼았는데 그때 분봉한 지역이 산동성 북방에 있던 땅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하북성 남쪽 산동성 북쪽에 있던 고죽국 영토가 고조선에 의해 병합된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발해조선을 한반도 대동강 유역으로 몰아내고 고죽국이 제환공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간주하여, 전국 7웅 중 가장 약소 국가인 연나라를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에 걸쳐서 지배력을 행사한 초강대국으로 묘사한 것이 한족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중국 고대사다.
그러나 하북성 남쪽 한쪽 귀퉁이 겨우 수백리 땅을 소유했던 연나라는 가장 강성했던 소왕 때도 그 강역은 압록강 서쪽은커녕 하북성 북경시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도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한 것이 아니라 잠시였다.
오늘의 하북성과 산동성 동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고죽국은 춘추시대 제나라가 멸망시켜 뒤에 연나라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통합되어 고조선이 발해유역의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아우르는 강대한 나라로 발전했다는 것이 사마천 '사기'가 말하는 역사의 진실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발해까지를 진나라의 강역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사마천 '사기' 진시황본기는 진시황의 동쪽 강역은 동해라고 분명히 말한다.
현대 중국에서는 발해유역의 하북성 북대하, 노룡현 일대를 진시황이 다녀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시황본기는 진시황이 통일 후에 다녀간 곳은 산동성 동쪽의 성산과 지부라고 말한다.
'사기'에서는 제환공이 "고죽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는데 현대 중국에서는 제환공이 고죽국을 멸망시켰다고 확대해석한다.
하북성 진황도시는 하, 은, 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서한시대까지 고죽국, 고조선 영토였는데 한족들이 역사를 조작하여 연나라 영토에 포함시켰고 이제는 뚜렸한 근거도 없이 진황도시라고 지명까지 바꾼 것은 고조선과 고죽국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잔꾀에 지나지 않는다.
◆진황도시 북대하의 진시황 행궁유적은 가짜다
중국 공산당은 진시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할 때 창건한 대형 행궁유적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진황도시 북대하구에 진시황제의 행궁유적을 건축해놓았다.
이 진시황 행궁유적은 1996년 중국 국가문물국으로부터 전국 10대 고고 발견 중의 하나로 인정되었고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진황도시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가 된 것이다.
하북성 진황도시의 북대하, 노룡현, 창려현 일대는 춘추시대의 고죽국 땅이고 본래는 기자가 망명한 고조선 영토였다. 고조선의 영토이자 고죽국 땅인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에 진시황제의 행궁유적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진황도시 북대하의 진시황 행궁유적은 중국 공산당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세워놓은 가짜 행궁이다
◆진황도시는 고조선시나 고죽국시로 바꾸어야
진시황의 만리장성 동쪽 끝은 거용관까지이고 산해관에서 거용관까지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아니라 그 뒤 명나라 때 쌓은 명나라 장성이다.
중국지도 상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산해관까지 그린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북한의 수안까지 고무줄 늘이듯이 늘여놓은 것도 있는데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회남자'에 의하면 천하의 중요한 관문 아홉 개(九塞)를 나열하였는데 산해관은 거기 포함되지 않았고 거용관居庸關을 동쪽의 마지막 관문으로 열거했다.
회남자 유안은 유방의 손자로 서한시대 사람이다. 이는 한나라 이전에는 산해관은 없었고 만리장성 동쪽의 마지막 관문은 거용관이었음을 말해준다.
진시황 때 중국의 강역은 북쪽은 북경의 거용관, 동쪽은 동해의 성산두, 지부, 무체현 남쪽까지였다. 진나라의 동쪽, 북쪽 강역이 명확해지면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했던 발해조선의 위치가 대충 나온다. 산동성의 지부, 성산, 무체현 북쪽과 만리장성의 거용관 동쪽 즉 발해만 일대가 발해조선이 차지하고 있던 강역, 특히 그 중심지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문헌적 고고학적으로 전혀 증명된 바 없는 진시황을 끌어들이고 그곳에서 발굴한 궁전유적을 마치 진시황제의 행궁유적인양 날조하고 또 그것을 전 중국의 10대 고고 발굴성과로 치켜세우면서 이를 바탕으로 지명을 진황도시라고 바꾼 것은 발해유역의 첫 국가 발해조선과 동이족 강대국가 고죽국의 역사주권을 말살하려는 속이 뻔히 보이는 얕은 수작이다.
진황도시는 본래 고조선,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므로 현대적으로 명칭을 바꾼다면 고조선시나 고죽국시로 변경하는 것이 이 지역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부합된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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