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아직도 살아 꿈틀대는 중화(中華) 사대주의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일본의 근대화는 '중화(中華) 질서'로부터의 이탈과 짝을 이룬다. 일본은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통제하에 1641년부터 나가사키(長崎)의 인공섬 데지마(出島)에서 일본과 교역했던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유럽의 근대 지식과 세계 정세 정보를 흡수했다. 이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 일본 근대화의 지적·이념적 기초를 만든 '란가쿠'(蘭學)이다. 이는 일본을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각성으로 이끌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란가쿠의 형성·발전 과정을 기술한 스승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원고를 정리한 '난학사시'(蘭學事始)의 저자이자 란가쿠 사숙(私塾)인 지란당(芝蘭堂)을 세운 오쓰키 겐타쿠(大槻玄澤)의 중화 비판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중국을 모방해 왔으며 그들의 방식으로 마냥 즐겁게 지내 왔다. 세계 지리를 보면 이런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엉터리였으며 눈과 귀로 직접 얻게 되는 지식을 얼마나 방해해 왔는지 알게 된다."

'일본주의' 탄생을 이끈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비판은 더 혹독하다. "중국의 가르침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통용된다는 것만큼 진실과 동떨어진 말은 없다.(중략) 중국의 성인은 특수한 기만술을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데 성공한 패거리에 불과하다. 중국의 정신인 당심(唐心)은 속임수의 언어에 불과하고 일종의 폭력이며 지(智)와 덕(德)과는 동떨어져 있다."('난학의 세계사', 이종찬)

같은 시기 조선은 '중화 질서'의 포로였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청(淸)에 멸망당한 명(明)을 그리워했다. 그 부끄러움의 집약체가 숙종이 1704년 창덕궁 후원에 세운 '큰 은혜를 갚기 위해 쌓은 제단'이란 뜻의 '대보단'(大報壇)이다. 여기서 조선 임금은 매년 세자와 신하들을 대동해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신종(神宗)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 청의 눈을 피해 깊은 밤에.('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김용삼)

대보단은 영조대에 명 태조 주원장,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도 제향(祭享)하는 '만신전'(萬神殿)으로 확대됐으며, 이들 황제 귀신들 제사는 갑오개혁이 시작된 1894년까지 190여 년간 지속됐다. 조선이 이렇게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과 귀를 닫은 채 소중화의 판타지에 빠져 있는 동안 일본은 서구의 위협에서 자신의 존립을 어떻게 지킬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해법을 찾고 있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런 부끄러움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는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데 베팅하면 후회할 것"이라며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에 대해 일장 훈시(訓示)한 중국 대사의 장광설을 두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찍소리 않고 듣고만 있었다. 왜 그랬을까? 맞는 말이라고 여겼나, 아니면 중국 대사의 공격이 자신을 '탄압'하는 윤석열 정부를 향한 것이어서 정치적으로 업을 만하다고 생각했나?

어느 쪽인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무엇이 됐든 조선의 중화 사대주의가 이 땅에서 아직도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중화 사대주의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미 시연했다.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며. 중국 대사의 비례(非禮)에 대한 이재명의 공손한 경청도 이와 다를 게 없다.

대보단도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조선 왕조의 대보단은 192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됐지만 재야의 대보단은 경기도 조종면 대보리에 '대통묘'(大統廟)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뭘 기념한다는 것인지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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