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기다림. 노열 작가의 작업은 이 두 단어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중력에 의한 물감의 흐름과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 그의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지난 16일 찾은 청도 풍각면 작업실은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 고요했다. 그는 2000년 폐교된 풍각초 분교의 일부 공간을 2005년부터 18년째 쓰고 있다. 두 개의 교실을 작업실과 전시실로 활용하고, 복도는 그의 작품들이 줄지어 놓이거나 매달린 수장고가 됐다.
노 작가는 작업 과정을 먼저 설명했다. 캔버스나 기성품 위에 물, 바니시를 섞은 물감을 칠하거나 담근 뒤 거꾸로 걸쳐둬, 물감이 떨어지고 마르면 다시 같은 행위를 수십번 반복한다. 물감이 지나간 길 혹은 물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중첩되며 고드름이나 물결 같은 인위적인 중력 조각이 형성된다.
"중력은 곧 자연의 순리, 법칙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흐름을 따르는 동시에 물감이 마를 때까지 오랜 기다림의 연속으로 이뤄지는 작업이죠."
그가 물감 고드름 작업에 천착하기 시작한 건 1999년. 그림을 너무 빨리 그리는 그에게 한 선배가 수십겹의 물감을 올려 바탕을 완성하는 어느 작가의 얘기를 들려줬고, 그것이 작업의 변화를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한창 물감 고드름 작업을 해오다 2005년 청도로 이사 온 이후, 그는 조금 더 큰 틀에서 작품을 바라보기로 한다. 그는 "'흐름'이 내 작업을, 내 삶을 관통하는 큰 주제임을 알았다"며 "자연의 순리이자 모든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단어였다"고 말했다.
이어 "청도로 올 때 개인적으로 여러 상황이 안좋아서 혼자 해결해보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있었다. 억지로 벽을 깨부수려하지 않고 내 삶의 흐름에, 자연 순환의 법칙에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물감을 올린 뒤 뒤집어놓고 고드름이 마를 동안 그는 산책을 나간다. 산책도 작업 과정의 하나인 셈. "복잡한 마음을 비워야 또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산책을 하다보면 자연히 생각이 정리되고, 신선한 아이디어도 떠오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의 작품은 사실 20여 년간 큰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매 전시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서는 감탄이 터져나온다.
지난 10일까지 을갤러리에서 선보인 전시 'with natural flow'에서도 그는 높이 9~10m의 전시장 공중에 고드름 철제 구조물만을 띄워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전시장에서 직접 보름간 물감을 묻히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오로지 중력만을 따라 늘어진 물감들은 속도 경쟁을 위해 흐름을 거스르는 시대에,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에 대한 화두를 던져줬다.
그는 "작업의 변화도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갑자기 확 바뀌기보다 어느새 봄이 오고 여름, 가을을 맞게 되는 것처럼 서서히, 조금씩 바뀌는 형태도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작품은 삶의 반영이자 자기 성찰이다. 앞으로도 자연의 순리, 생멸의 흐름, 기다림의 느림이라는 의미를 담은 '중력 조각'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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