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스마트폰이 떨어질 새가 없다. 80억 지구인은 스마트폰이 열어준 온라인 정보 공유 시스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진심을 털어놓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지라도 SNS상의 친구는 수백, 수천 명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자기가 찍은 사진을 공유하고 누군가가 게시한 사진과 글을 열람한다. 누구나 화가든 사진가든 소설가든 뭐든지 될 수 있다. 하물며 AI가 창작을 대신하는 시대이다. 이렇게 창작과 소비의 경계가 모호한 삶을 살아가는 오늘 창작과 예술의 의미를 새삼 생각한다. 예술의 존재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미술사는 예술과 예술가의 개념을 여러 차례 고쳐 썼다. 생각나는 데로 열거해 보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예술가는 아무 창작행위도 하지 않고 제시만 한다.', 앤디 워홀(Andy Warhol) '예술은 유일하지 않고 복제의 복제이며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예술 작품의 재료도 제작 방법도 산업적 생산의 범주이다.', 솔 르윗(Sol LeWitte) '예술가는 아이디어-개념만 만들고 제작은 타자에게 맡긴다.'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도가 있었다.
하나같이 특수한 기술이나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예술과 예술가의 개념을 확장한다. 또한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미술과 미술이 아닌 것을 지각으로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인데, 그는 미술사의 내러티브-바사리의 내러티브(고전미학-모방의 논리)와 그린버그의 내러티브(근대미학-순수성, 평면성의 강조)가 끝났고, 모든 것이 가능하며 무엇이든 예술이 되는 '다원주의'를 종말 이후의 해답으로 제시했다.
한편 우리는 끝없는 디지털의 바다에서 여러 가지를 즐기고 있지만, 누가 그걸 만들었는가 하는 점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그것들을 소비한다. 이제 그림을 누가 그렸는가, 사진을 누가 찍었는가 하는 문제가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되고 있다. 언뜻 보면,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말이 현실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하게 누구든 화가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창조력을 발휘할 때, 즉 모두가 예술가가 될 때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20대에 처음 요셉 보이스의 생각을 접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진정한 앎은 머리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화가로서 사회적 실천, 적극적 행동을 주저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대구가 시끄럽다. 미술의 자율성, 제도적 독립성이 주목받고 있다. 과연 우리 미술인은 어떤 한목소리를 내야 할까. 어떤 사실이든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나부터 문제를 직시하면서 하나의 답을 요셉 보이스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예술과 예술가의 의미는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그 힘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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