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주민들은 피난 동포에게 동족애로 서로가 동정해야 할 일이나 서울 혹은 경기지역에서 피난민들이 자기들의 습관과 풍속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주민을 비방하는 일은 극히 상호 간의 동정심을 저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서로 겸양한 태도로 서로가 양보하여 불평과 불만을 없애고 고충을 견뎌 나가도록 특히 요망하는 바이다.' (매일신문 전신 대구매일 1951년 1월 7일 자)
6‧25전쟁 중에 현지 주민과 피난민이 싸우지 말라는 담화가 나왔다. 허억 대구시장이 낸 메시지였다. 이는 대구로 몰려든 피난민과 연관이 있었다. 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서울을 되찾고 38선을 넘어 일사천리로 북진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북으로의 진군은 벽에 부딪혔다.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에 밀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다시 후퇴했다. 피난민이 남쪽으로 밀려왔다.
대구에도 1‧4후퇴로 피난민 행렬이 줄을 이었다. 많게는 하루에 2만 명이 내려왔다. 며칠 만에 대구에 모여든 피난민은 10만 명에 달했다. 피난민을 찾아온 친지 또는 연고자, 기타 관련자들을 합치면 족히 20만 명은 되었다. 한해 전인 1950년 전쟁 초기에 몰려든 13만여 명에 비하면 7만 명 넘게 증가했다. 피난민이 크게 늘자 수용시설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피난민 가운데 2만 3천 명 정도만 수용소 생활을 했다.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피난민들은 떠돌이가 되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밤이 되면 노숙했다. 피난민들에게 1월의 엄동설한은 더 큰 고통을 안겼다. 배고픔 못지않게 살을 에는 찬바람에 치를 떨었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쫓기다시피 온 피난민들은 먹고 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고 피난민의 처지가 다 똑같지는 않았다. 일부는 피난과는 거리가 먼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했다.
대부분 피난민은 가재도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나왔다. 수중에 돈이 없었던데다 도보 피난이다 보니 덩치가 큰 물건은 아예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 부유층의 피난은 시작부터 달랐다. 자동차로 피난을 왔다. 일상 용품에다 은수저와 심지어 병풍, 돗자리를 싣고 오기도 했다. 피난지에 도착한 이들에게 전쟁은 대수롭지 않았다. 피난지의 다방이나 요정에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대구의 요정도 잘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에 돈은 무기만큼 위력이 컸다.
부유층 피난민 중 일부는 토착 주민을 업신여기고 말을 함부로 했다. 경북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트집 잡았다. 스스로 특별함을 내세우면 피난 생활서도 대접받는다고 여겼을까. 자신들은 보통의 피난민과는 신분이 다르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특히 경북 사투리를 흉내 내고 지역 사람들을 비하하다 대구 여인들과 종종 충돌했다. 주로 서울서 피난 온 여인들이었다. 이 동네 저 동네서 주민과 피난민 사이에 다툼이 잦자 대구시장이 자중을 요청하는 담화를 내기에 이르렀다.
'~시내 동인동 277에 거주하는 임성구 씨는 자기 부인과 의논하고 자기의 주택을 전부 피난 동포들을 위하여 제공하고자 처와 아이들은 친척 집에 유숙하면서 피난 동포 십 수명을 수용 구호하고 있다는데 이들의 미행은 일반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였으며 사리사욕에만 허덕이며 동족의 참상을 본체만체하는 비애국적, 비애족적인 자들에게 큰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대구매일 1951년 1월 6일 자)
피난민이 갈수록 늘자 당국은 여관이나 요정, 학교 등을 활용했으나 수용인원은 턱없이 적었다. 돈이 없는 피난민은 거리를 맴돌기 일쑤였다. 당국은 일반주택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방을 피난민들에게 제공하려 했다. 이를 위해 월세 등으로 돈벌이 나서는 집주인들이 조사에 응하지 않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당국은 피난민들의 딱한 사정을 악용해 사욕을 챙긴다고 봤다. 임대차계약 취소와 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피난민 가운데는 무의무탁으로 돈 한 푼 없이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사정이 훨씬 딱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뜻 자신의 주거 공간을 내준 주민이 있었다. 피난민들의 시급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대구시 동인동에 사는 주민 임 씨는 자신이 사는 집을 피난민들에게 제공했다. 이 집은 애초 빈집은 아니었다. 함께 살던 아내와 아이들을 친척 집에 보냈다. 대신에 피난 동포 10여 명을 들어와 살도록 했다. 당시 동인동 임 씨의 이야기는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사는 피난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전쟁 중에도 서울서 내려온 일부 피난민의 언행은 안하무인이었다. 경북 사투리를 조롱하고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다 대구 시민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서울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농촌 등의 인구 유입에서 기인했다. 그들이야말로 경북 출신은 아니었을까.
박창원(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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