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악산 자락 성북동은 부촌이자 외교관저 지대로 이름 높다. 이곳 중국 대사관저에서 지난 8일 저녁 만찬이 열렸다. 싱하이밍 중국대사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초대한 자리였다. 싱대사의 도넘은 내정간섭 지적부터 이대표의 저자세 굴종외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기에 한동훈 장관이 싱대사의 초청을 지난 2월 정중히 거절했다는 소식까지 더해져 국익논란을 더욱 달궜다.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이 싱대사를 조선말기 청나라 원세개에 비유하면서 사대 굴욕외교 논란은 화룡점정으로 치달았다. 영국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라고 설파했다. 조선 말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반추해 본다.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이자 황제 원세개 저택
중국 텐진(天津)으로 가보자. 텐진은 몽골의 대원제국 시절 수도 대도(북경)의 관문으로 개설됐다. 1858년 서구에 문을 연 텐진은 상하이에 이어 중국에서 2번째로 큰 항구도시다. 시내 중심가에 하이허(海河)가 흐른다.
하이허는 한나라(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한 왕망(王莽)과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光武帝) 유수의 패권 전투,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비롯해 중국 역사의 운명을 가른 주요 전투의 현장이자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의 태항산(太行山), 태항산맥에서 발원한다. 중국 북부의 곡창 화북평원을 적신 뒤, 텐진을 가로질러 서해(黃海)에 이른다.
하이허 강변 시내 중심지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가미한 근대 서양식 대저택이 우뚝 솟았다. 안내판을 보면 원원씨택저(原袁氏宅邸). 텐진시 역사건축물로 보호받는 이 저택의 원래 주인 원씨는 누구인가? 중국 현대사를 풍미했던 원세개(袁世凱)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 발발로 여진족의 청나라가 붕괴되고, 1912년 1월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인 된 인물이다. 이후 1916년 1월 황제 자리에 올랐다가 전국적 반대에 봉착하자 그해 6월 좌절 속에 57살로 죽었다. 조선 여인도 부인 가운데 한명으로 뒀던 원세개는 젊은 시절 조선에서 활약으로 중국 역사 중심무대에 올라설 수 있었다.
◆임오군란과 흥선대원군 재집권
서울 남대문(숭례문)에서 소월로 건너편에 숭례문 수입상가가 자리한다. 상가 앞 화단에 1989년 설치된 작은 표지석이 탐방객을 맞아준다. [선혜청터]. 선혜청은 각종 특산물(貢物)을 쌀로 받는 대동법 시행에 맞춰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설치됐다. 대동법의 별칭 '선혜지법'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조선 후기 환곡미를 담당하던 상평청, 균역법에 따라 군포를 관리하던 균역청을 흡수한 선혜청은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 경제부서였다. 이곳 선혜청에서 1882년 고종 19년 6월 9일 사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 뒤 집권한 민씨 세력(명성황후 친족)은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1881년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한다. 구식군대 처우는 신식 군대 군인에 비해 좋지 않았다. 급료도 13개월이나 밀려 불만이 고조된다. 6월 초 전라도에서 올라온 세미를 선혜청 도봉소에서 급료로 지급할 때 모래를 섞고, 그것도 절반에 그친다. 포수 김춘영 등 구식군인들은 선혜청 당상이자 민씨 세력 핵심인물 민겸호의 불호령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에 사형처분을 받는다.
격분한 구식군인들이 6월 9일 권좌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을 만난데 이어, 포도청에 구금된 동료를 구출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간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달아난다. 10일 민겸호와 경기관찰사 김보현등이 살해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정국 수습의 전권을 맡긴다. 흥선대원군은 9년 만에 권력을 다시 잡는다.
◆23살 원세개, 62살 흥선대원군 텐진 납치
영동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여주방향으로 불과 500여m 거리에 명성황후 생가가 자리한다. 여흥(여주) 민씨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 숙종의 비 인현왕후에 이어 고종의 비 명성황후도 배출한 가문이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명성황후는 시어머니이자 같은 민씨 세력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궁궐을 벗어나 여주 생가를 거쳐 장호원 민응식의 집, 충북 노은 등에 숨어지내며 목숨을 건진다. 그사이 흥선대원군은 정적이자 며느리 명성황후 사망을 선포하고 국장을 진행한다.
인천에서 영국 상선의 도움으로 일본에 간 하나부사 공사는 병력 1천5백명을 대동하고 인천으로 돌아온다. 1개 중대 병력과 서울로 들어와 7월 7일 고종을 만나 무리한 요구를 쏟아내고, 조정은 혼란에 빠진다. 1636년 1월 삼전도의 굴욕 뒤, 조선의 종주국을 자임하던 청나라는 조선에서 지배권 유지 계략을 짠다. 실권자 흥선대원군 제거작전. 7월 12일 마건충, 오장경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온다.
일본 하나부사 공사를 만나 청일 교섭을 확약하고 7월 13일 오후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텐진에 유폐시킨다. 62살 고령의 흥선대원군 납치 주역이 오장경의 부하이던 23살 애송이 원세개다. 7월 14일 고종은 마건충의 수습책을 받아들인다. 청나라는 조선 종주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다진다. 청나라 최고 실력자 리훙장의 추천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조선정부 고문으로 온다. 조선군대는 청나라 지휘 아래 재편된다. 원세개는 대원군 납치, 임오군란 평정의 공을 세우며 서울에 머문다.
◆원세개, 조선내정 간섭 기반으로 출세
서울 인사동에서 우정국로를 건너면 대한불교 조계종의 중심지 조계사에 이른다. 조계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반듯한 한옥 건물이 탐방객을 맞아준다. 한국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건물이다. 임오군란 2년 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청 기념식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김옥균 주도의 혁명 세력은 청나라 속국 상태에서 조선을 독립시키고, 자주개혁의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를 세운다. 자체 군대를 양성하지 못했던 김옥균 혁명파는 당시 일본군의 지원에 기대어 거사를 진행한다. 이를 좌절시킨 인물이 원세개다. 갑신정변이 터지자 3일 만에 김옥균 혁명세력과 이들을 호위하던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청나라 진영으로 옮기며 다시 한번 조선에서 주도권을 확보한다.
1885년 11월 26살의 원세개는 이홍장으로부터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긴 직함을 받고, 조선에 주재한다. 이미 조선이 서양각국과 통상교섭을 마친 상태여서 통상 교섭할 일은 별로 없다. 청나라를 대표해 조선에 주재하며 조선내정에 간섭한다. 사실상 조선총독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종주국 지위는 무너진다. 청나라는 망해갔지만, 이후 원세개의 지위는 더욱 높아진다.
◆21세기 대한민국, 원세개의 그림자
조선에서 닦은 실력을 인정받아 직례안찰사로 승진하고, 텐진에 머물며 신식군대를 양성한다. 그가 양성한 군대는 1898년 청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무술정변 때 개혁파를 탄압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1901년 이홍장이 숨지면서 원세개는 청나라 최고의 군사 실력자로 떠오른다.
1908년 3살짜리 마지막 황제 부의가 즉위한 뒤, 황실의 견제로 잠시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그를 되살린다. 사태수습을 위해 황실이 그에게 총리대신을 맡긴 것이다. 청나라 재건보다 자신의 권력구축에 더 몰두한 그는 1912년 황제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에 오른다. 조선을 기반으로 성장한 원세개의 정치역정 그림자가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에 다시 어른거린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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