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이 행정기관에 직접 출생신고를 하는 출생통보제에 관한 전산 시스템이 23년 전인 2000년도에 연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실제 사용까지 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도 10년 전에 도입하기로 약속했으나 정작 관련 법안은 모두 상임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정부와 국회가 출생신고제를 방치하는 사이 수많은 아이들이 죽거나 실종됐다.
지난 2013년 7월 국회의장 자문위원회 '여성·아동 미래비전'이 그동안의 자문 활동을 담은 7대 과제를 발표했다. 그중에는 '출생신고 체계개선'도 있었다. 해당 연구는 여성·아동 미래비전 자문위원인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과 박정한(78) 명예교수가 맡았다.
현행 출생신고 제도는 출생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부모가 행정복지센터에 신고만 하면 된다. 부모의 의사에 따라 출생 신고가 누락되거나 불법 입양·유기·인신매매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2011년 유엔아동권리위원회와 2012년 10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한국에 대해 출생신고제를 출생자동등록제로 전환하도록 권고했다.
박 교수가 제안한 '출생신고 전산체계 구축안'은 광역자치단체별로 지역출산정보센터를 설치하고 의료기관이 곧바로 출생신고를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출생신고에 동의하지 않은 산모가 있으면 산모의 정보를 제외한 채 출생 기록만 넘기도록 시스템화했다.
모자보건학 등을 전공한 박 교수가 한국의 출생신고제에 처음 관심을 갖고 연구 자료를 발표한 건 지난 1998년이다. 당시 한국의 영아사망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파악한 박 교수는 출생신고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2000년에는 '출생 및 영유아 신고체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보완할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연까지 했다.
당시 포항, 천안에 있는 산부인과와 보건소에서 실험한 결과 기술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연구진은 연구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해 지난 2008년 '신생아 출생정보 제공 전산체계 구축 최종보고서'를 발표하고 보건복지부에 제출했다.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출생신고제는 계속 유지됐다. 박 교수가 여성·아동 미래비전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강창희 전 국회의원은 반드시 고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관련 법안도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 18대 국회부터 15건이나 발의됐지만 모두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박 교수는 정부와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탄했다. 출생 신고에 관여하는 곳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대법원, 통계청 등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제대로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입법·사법·행정부가 외면하는 사이 수많은 아이가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출산 기록은 있으나 출생신고가 안 된 영유아는 2천236명이다. 위험도가 높은 23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최소 5명이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건복지부는 2천236명에 대한 전수조사를 예고했다.
대구에서도 한 대학병원에서 벌어진 '산모 바꿔치기' 사건을 통해 음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아동 매매와 불법 입양 실태가 드러났다.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37세 여성은 지난 2020년부터 최근까지 최소 4명의 아이를 불법으로 입양시키거나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금도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이나 텔레그램 등에선 영아 매매 관련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박 교수는 "연구진이 오래전부터 꾸준히 같은 내용의 정책 제안을 해도 제때 필요한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참 답답했다"며 "출생신고 1건당 적정한 분만관리 수가를 정부가 지급하면 의료계의 반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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