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둔 메모를 꺼내 본다. 종이가 없어서 냅킨에다 파란색 볼펜으로 급히 적은 것이다. 남에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이것이 내게는 소중하다. 사물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도 미술을 하면서 길러졌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다르고 독특한 점들이 하나같이 가치 있어 보인다. 어쨌든 메모 날짜는 2014년 6월 27일이다. 내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니지만 이날은 잊지 못할 날이다. 마지막 칼럼은 교육이 예술이라는 이야기다.
이날 한국교육학회가 고려대에서 개최됐다. 나는 경북대 교육학과 대학원생들과 학회 발표를 들으러 갔다. 당시 나는 학회에서 발표할 상태가 아니었다. 박사 과정의 1년 공부가 내 머리를 초기화시켜 버려서 어디로 갈지 항로를 정하지 못하고 그저 너무 넓은 지식의 바다를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해 학회는 이틀간 개최됐다. 올라간 참에 실컷 논문 발표를 듣겠노라고 고려대 부근에서 방을 잡았다. 저녁에 연구실 동료, 지도 교수와 함께했다. 교육학 세부 전공 교육과정학의 지도 교수는 강현석 교수님이다.
메모에는 '강교수님의 말씀-애플렌드, 인지중심 미술교육, 래티스 모형, 예술 교육과정의 새로운 패러다임, 아이스너, 케터링 프로젝트, 경험으로서 예술' 이런 낱말들이 적혀있다. 교육과정학과 미술학을 잇는 윤곽을 잡는 중심어들이다. 나는 결국 아이스너의 인식론으로 학위를 받았다. 예술과 과학은 인지 행위에 근거하고, 앎의 문제(미적 앎)가 미술이며 미술 교과는 사고력을 키우는 주요 교과라는 미술관과 미술교육관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강 교수님이 내게 요구한 작품은 아직 미완성이다.
며칠 전의 일화가 떠오른다. 한 감상자가 한 미술가에게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가 물었다. 미술가는 자기도 그것은 모른다고 답했다. 미술가는 진솔하게 말하고자 했지만, 그의 말에 감상자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감상자는 미술가가 의미를 알려주기를 바라고 미술가는 감상자가 의미를 구성하기를 바란다. 미술작품을 사이에 두고 입장의 차이가 충돌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의 발단은 역시 우리 교육에 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시한 지식 전달식 교육을 한 탓에(그런 교육을 받은 탓에), 정답이 정해져 있어야 하고 정답을 누군가(권위자)가 알려줘야 한다. 정답을 알려주지 않으면 몹시 불편하다.
아이스너는 교육을 예술로, 교사를 예술가로 규정한다. 교육적 상상력(The Educational Imagination)'(1979)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의미 있고 다양한 학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교육목표와 내용을 변화시키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스너가 45년 전에 지적한 문제들(학생수 감소, 과학적이라는 신화 등)은 우리 사회에서 꾸준히 되살아난다. 좀비가 따로 없다. 미완의 작품(미학적 교육과정론)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학력 신장의 긴 그림자를 드리운 말들, 예컨대 깊이 있는 이해, 탐구 중심, 개념 기반에서 길을 찾기보다 진심으로 교육의 변화를 원한다면, 교육이 예술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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