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북동쪽에 위치한 일월산(日月山, 1,219m)은 정상에 일자봉(日字峰), 월자봉(月字峰) 두 봉우리가 있고 산정에서 보면 동해의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이 일월산 동쪽 윗대티 부근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흐른다. 산이 깊고 물이 맑아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서 목욕하였다고 하며 온갖 야생화와 산나물이 지천에 늘려 있다.
◆ 한양 조씨 집성촌
조선조 영양에 입향하여 번성한 가문으로 함양 오씨(咸陽吳氏)와 한양 조씨(漢陽趙氏)를 들 수 있다. 함양 오씨 영양 입향조 오필(吳滭, 1493~1553)은 조선 초 창신교위 중부장(彰信校尉中部將)을 지냈다. 그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남손(南蓀)의 딸과 혼인하여 상원리에 살림집을 차리고 세거하기 시작해 대성을 이루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영양의 인재라 불린 오극성(吳克成), 오윤성(吳允成) 형제가 그의 손자이다.
한양조씨는 조선 중기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화를 피해 한양에서 낙남한 조운종(趙云從:靜庵의 三從祖父)의 증손인 조원(趙源, 1511~?)이 영양에 살던 오필의 딸과 혼인하면서 영양 원당(지금의 상원리)에 정착했다. 그가 한양 조씨 영양 입향조이다. 그는 조광인(趙光仁), 조광의(趙光義) 두 아들을 두었고, 손자가 조검(趙儉), 조임(趙任), 조건(趙健), 조전(趙佺)이다.
주실마을은 1630년경 호은(壺隱) 조전이 이곳에 터를 잡아 세거하기 시작한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며 산골 등짝이 서로 맞닿아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注室) 또는 주곡(注谷)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마을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오직 하나뿐인데 주실이 배 모양의 지형이라 우물을 파면 배가 침몰할 것이며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해 우물이 하나밖에 없는 것도 특징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
주실은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다. 주실 마을에는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경상북도기념물)이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고,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의 옥천종택(玉川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조선 영조 49년(1773)에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남아 있다.
호은종택의 맞은편에는 정삼각형의 봉우리 즉, 풍수에서 말하는 문필봉(文筆峰)이 있고 그 옆에는 연적봉(硯滴峰), 그 뒤편에는 노적봉(露積峰)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필봉의 형상이 압권이다. 단순한 필봉이 아니라 봉황이 하늘로 솟구치려는 봉필사(鳳筆砂)의 기상이다. 봉황은 지존(至尊)이요 자존심의 상징이다.
또 한편으로는 불의에 굴하지 않겠다는 횃불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기상은 임진왜란 때 조씨 가문 전체가 마을을 비우고 곽재우(郭再祐) 장군 의진에 참여한 것이나, 일제 강점기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기품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조지훈의 기질 등으로 표출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필봉이 위치한 방위가 곤방(坤方)이니 이는 작가(作家)가 태어나는 기운이다. 그리하여 이곳 주실 마을에서 조지훈(본명:조동탁) 시인이 태어났고 마을의 집들도 대부분 이 문필봉을 마주하고 있다. 주실 마을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마을에서 인물 많이 나오기로 여기만 한 곳이 없을 정도이다.
유명 대학 교수들이 끝없이 손꼽힌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훈이다. 그는 한국 현대 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이었으며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이다. 민속학과 민족 운동사에 공헌하였고 한국문화사를 최초로 저술하였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오는 데에는 주실 마을 자체가 명당이기도 하지만 조상들의 음덕이 더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그중에서도 입향조 묘소가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계나들, 조계나들'이라는 전설
입향조 묘소는 상원리 소재 해발 380m 정도 되는 고지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영양문화원 발간 『내고장전통가꾸기』에 의하면 '오필의 딸이 친정 부친이 별세하자 오씨 문중에서는 평소에 잡아둔 명산(名山) 터를 장지로 정하고 장례 전일에 광내(壙內,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를 하여 두었는데, 이를 알아차린 딸이 남몰래 밤새도록 광내 한 곳에 물을 날라다 부었다. 다음날 오씨 상가에서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보니 광내한 곳에 물이 가득 고여 있으므로 이곳은 터가 나쁜 곳이라 하여 수척(數尺) 위에 다시 광내를 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 조씨 가문에 출가한 오씨 딸은 남편이 죽자 친정에 가서 적당한 장지가 없으니 친정아버지 묘지 아래 묻도록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우는 동생을 가련히 여긴 친정 오빠들이 승낙을 하자, 오씨 딸은 오씨 문중에서 처음 광내한 곳에다 남편의 묘를 썼다.
그후 오씨 문중에서는 출가한 오씨 딸의 간교한 계략으로 명산 터를 빼앗긴 것으로 알고 분통해하였다. 이로 인해 양성은 서로 원한을 갖고 마을앞 내(川)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따로 만들어 다니게 되었다고 하며 오씨들이 다니던 길을 '오계나들', 조씨들이 다니던 길을 '조계나들'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상원교'가 개통되고 나무다리가 없어짐으로써 자연스럽게 '오계나들, 조계나들'이라는 전설 또한 잊혀지게 되었고, 현재에는 옛날이야기로 치부하며 두 집안은 서로 잘 지낸다고 한다.

◆한양 조씨의 번성은 오씨 할머니 음덕
그런데 양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사위가 먼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기에 전래하는 전설과는 차이가 있다. 어쨌든 사위인 조원의 묘소가 소문대로 옥녀직기형(玉女織機形)의 천하 대명당인지 확인을 해 보자. 임도를 따라 한참 올라가니 묘소가 나온다. 비석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풍수에서 좌청룡, 우백호를 지칭하거나 비석에 방위를 표시할 때 기준은 현무봉이 된다. 묘소 뒤편에서 보아 좌측에 여자, 우측에 남자를 모시고, 비석에는 좌부(左祔)라고 표기를 한다. 자리가 여의치 않을 때는 반대로 쓰기도 한다. 그리고 비석에는 우부(右祔)로 표기한다. 여기에는 비석에 우부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좌측의 묘소가 조원의 묘소이고 우측의 묘소가 배(配) 되는 함양 오씨 묘소이다. 구미 금오산 상모동 산 중턱에 위치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조부모 묘소도 이러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정혈처는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배 되는 함양 오씨 묘소가 정혈처이다. 묘좌 유향(卯坐酉向)으로 조안산은 화개삼태(華蓋三台)이다. 이는 대귀(大貴)를 주관하고 백관(百官)을 다스리는 대신(大臣)이 나오는 기운이다. 결론적으로 한양 조씨의 번성은 오씨 할머니 음덕이 더해진 결과가 아닐까.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조지훈의 『지조론』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시절이다.

노 인 영(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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