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써 한반도 군사정전협정체제(이하 정전체제)는 70주년을 맞는다. 정전체제 70년의 시사점을 그날의 회담장에서 찾아보자. 6·25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경과한 1951년 6월 23일, 공산군 측은 그해 마지막 춘계 공세가 별 실효를 얻지 못하자 마리크(Marik) 구소련 유엔대표를 내세워 38도선으로 되돌아가는 휴전을 제의하였다. 중공군은 여기에 가장 먼저 동의했다.
유엔군 측 역시 미국이 아시아에 너무 몰두하면 무방비나 다름없는 유럽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소위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상대와 싸우는 잘못된 전쟁'에서 더 이상 완승을 기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나토 우선주의에 따라 명예로운 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정전회담은 1개월이면 충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무려 2년을 끌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협상에 임하는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서로가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유엔군 측은 '전쟁 재발 방지'에, 공산군 측은 '재침에 유리한 여건'을 만드는 데 각각 목적을 두었다.
환언하면 유엔군 측은 다음의 정치 회담을 기약할 수 없기에 '지켜질 수 있는 영속성을 갖는 협정'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조기 타결로 인명 피해를 막는 데 주안'을 둔 반면, 공산군 측은 '공산화'라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지키기 위한 협정이 아니라 다음을 위해 시간을 벌고, 회담장을 선전장으로 만드는 데 주안'을 두었던 것이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추구 목적 달라
회담 결과를 보면 가장 중요한 의제라 할 수 있는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가 대개 유엔군 측의 주장대로 되었다는 것은 공산군 측의 주장이 시간 벌기에 다름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군사분계선은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군사접촉선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협상의 상례임에도 불구하고 공산군 측은 38도선으로 원상복귀할 것과 외국군 철수를 추가로 제의함으로써 난항을 거듭하는 1차적 원인을 조성하였다.
그러면서 38도선을 기준으로 20㎞의 비무장지대를 두자고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38도선은 이미 전쟁을 불러온 무의미한 정치적인 선에 불과하며 옹진반도와 연안반도를 연하는 선은 천연 장애물이 없기에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데 불리하고, 외국군 철수 문제는 정치 사안이므로 군사회담에서 다룰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도리어 유엔군 측은 압도적인 해·공군력의 우세를 회담으로 상쇄하려는 공산군 측에 대해 이를 보상하여야 하며, 군사분계선을 현 접촉선보다 더 북쪽으로 연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38도선 이북으로 진출한 중동부 전선 지역과 개성 일대를 교환하자고 하였다. 공산군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유엔군 측은 실력으로 이를 성사시키려는 과감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회담 결렬을 우려한 워싱턴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후 공산군 측은 개성이라는 고도(古都)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전략적 가치를 간파하여, 유엔군 측의 방안을 따르더라도 옛 수도를 탈환했다는 승자 행세를 할 수 있고, 필요시 서울에 이르는 종심을 단축할 수 있어 재침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현 휴전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공산군 측은 유엔군의 해·공군력을 묶어두고 개성 일대를 고수함으로써 후일 '재침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 반면 유엔군 측은 자신의 방안을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략 부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애당초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이 38도선에는 천연 방어선이 없어 원상복구안을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외국군 철수와 같은 풀기 어려운 정치 문제를 함께 들고나와 시간을 끈 것이다.
◆회담 장소에 대한 아쉬움
시간을 끈 이유는 당시 소진 상태에 있는 군사력 사정 때문이었다. 공산군은 만주에 보급기지를 두고 있었는데 38도선까지가 사실상 병참 능력의 한계였다. 특히 중공군은 군사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고, 본토의 내부 불안정과 대만의 침공 우려, 베트남 문제, 인도와의 국경 문제 등으로 더 이상 한반도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기에 휴전에 나선 것이나, 유엔군 측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군사력의 우위를 협상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이다.
향후 정전체제의 안정성을 담보하고 순조로운 정치 회담으로 가기 위해 쌍방이 전력 증강을 금하고 이를 감시·감독하는 의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 의제에 대하여 공산군 측은 유엔군의 교대 근무를 트집 잡고 내정간섭 운운하며 진지한 논의를 회피하였다. 후일 북한이 정전체제를 유명무실화하는 도발 책동을 서슴지 않으면서 그 뒤에 숨어 핵개발까지 해온 점을 생각하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기에 앞서 공고한 국제 감시·감독체제부터 구축해 놓는 것이 순서였는지 모른다.
회담 장소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유엔군 측은 제3의 장소인 덴마크 병원선을 지목했으나 공산군 측은 이를 거부하고 개성을 고집하였다. 유엔군 측은 큰 고려 없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는 실책이었다. 공산군 측은 차량에 백기를 달자고 제의하고, 백기를 단 유엔군 대표단을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와 마치 휴전을 구걸하는 모양새로 이미지화하고, 자신이 이긴 전쟁으로 국제사회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개성을 중심으로 8㎞의 중립지대가 설정되면서 개성 일대는 성역이 되었다. 공산군 측은 개성 일대에 공습 사건을 조작하여 국제사회에 공표함으로써 유엔군 측을 곤경에 빠뜨리고 회담 진행을 방해하기도 했다.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속개하였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군사력 사용을 제한하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회담 장소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다음을 위한 포석, 시간 벌기
유엔군 측은 중립적인 제3의 장소를 끝까지 관철시켜야 했던 것이다. 이러는 한편 회담이 시작되면서 지리산 일대에는 남부전선사령부가 편성되어 후방 교란을 본격화했고, 유엔군 측으로 하여금 전방 2개 사단을 차출케 하고 회담장에도 부담을 안겨준 점 또한 기억할 일이다.
이렇듯 공산군 측에 있어 휴전과 회담이란 철저히 '다음을 위한 포석이요, 시간 벌기'였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그 해 8월 유엔총회에서는 정전협정의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1954년 4월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국 등 19개국 외교장관이 제네바에서 정치 회담을 개최하였으나, 전혀 호응할 생각이 없는 공산군 측은 상투적인 외국군 철수만을 고집한 탓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외국군은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장치가 아니라 공산화에 가장 큰 방해꾼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참전 16개국은 1953년 7월 '무력 공격이 재발하면 즉각 대항'할 것을 결의하는 '워싱턴선언'을 채택하였고, 그해 10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한반도의 안전을 위해 매우 적시적인 조치였으며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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