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3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아이는 기다리지 않고 어른이 된다' - 이종숙

속이 상한다 빈속을 끌어안고 숲속을 걷는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비틀거리며 울렁거리는 속으로 냉장고 속을 뒤진다 먹다 남은 김치찌개 구운 생선 반 토박 숙주나물 호박전 미역국이 보다 냉동실엔 만두봉지 피자조각 치킨도 있다

첫 손자 맞은 당신께선 상한 음식 먹이지 말라며 이백평 옥답 팔아 냉장고를 사주셨죠 나는 헛바람 가득 차서 집 밖으로 떠다니고 냉장고엔 차곡차곡 음식이 쌓여가고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잊혀진 밤톨에선 밤벌레가 기어 나와 추위에 얼어 죽어 콩알 되어 굴러다니고 일 년이 지나도 열어보지 않은 플라스틱 통들이 늘어나고 아이는 엄마 얼굴 낯설어 합니다

상한 음식이 아니랍니다 엄마의 상한 마음이 아이의 유년기 애착형성을 방해하고 아이는 밤벌레 콩으로 혼자 공놀이 하고 사춘기 방황은 외면당하고 마음 상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에미는 속상하다 합니다 에미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른이 된 아이도 속상하다 합니다 아이가 잘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미와 아이가 모두 속상합니다

냉장고 속을 비우겠습니다 냉장실을 냉동실을 통째로 비우겠습니다 상한 식재료가 아닌 상한 마음이 아닌 따뜻한 음식으로 어른이 된 아이를 찾아 가겠습니다 첫 손자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속상해하지 않고 속을 비우겠습니다

오월 오후 산책길에서 냉장고 속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상한 속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살랑이는 바람이 알려줍니다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이종숙
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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