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3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무상 속에 걸어온 길' - 강두순

강두순
강두순

머리말

내 인생에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건이라면 사건이고 영광이라면 영광이랄 수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그 일이란 게 바로 지구촌 대축제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대한민국 대표(전국:29명)로 선발된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때가 제1회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개최 이후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소중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주최 측에서 마련한 뜻깊은 이벤트 행사였다. IOC 250개 회원국이 다 함께 참가해서 우정을 나누기 위해 지구촌 대축제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가 펼쳐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에 옹기종기 모여 화목을 다지며 살아온 지구촌 사람들 중에서 선택된 이 날의 주인공은 IOC국가 차원이나 개인적으로도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언론의 젖줄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매일신문 주최 제9회 시니어 문학상 공모전 논픽션 부문에 본인이 참가하게 된 글제 :'無償속에 걸어온 길' 의 소 제목으로 '그 날 이전'과 '그 날 이후'로 편성을 완료했다.

본인이 들려주고 싶은 그 날의 의미는 '1996미국애틀랜타 올림픽 성화봉송주자 한국대표로 참가했던 날을 간직하기 위해 저자 임의로 정한 소재라는 사실을 이 지면을 통해 밝힌다.

서론 머리말

제1편: 그 날 이전

제2편: 그 날 이후

제1편, 그 날 이전

'1996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대한민국 대표(전국 29명)로 최종 선발되는 과정이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리스 아테네 올림피아 성전에서 채화된 성화가 1996년 4월 27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후 미국 42개 주, 총 15,000마일을 84일 동안 릴레이로 돌고 돌아 봉송되었다. 1996년 8월4일 개막식 날 애틀랜타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점화된 후 활활 타오르게 될 성화 봉송을 위해 주자로 동원된 사람은 총 일만 명이나 되었다.

미국 국내 선발 7,500명(주자, 보조 주자 포함) 해외 선발 2,500명(주자, 보조 주자 포함)으로 올림픽 100주년 행사에 IOC 회원 250개국 대표 겸 대한민국 대표 성화 봉송 주자(총 29명 중 주자:24명, 보조 주자:5명)도 함께 참여할 기회가 온 것이다. 최종 성화 봉송 주자로 선발될 수 있을 확률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당시 세계 인구가 60억이라고 추정했을 때 미국 자체선발을 제외한 해외 선발 2,500명을 백분율로 계산하면 2,500/60 억= 0.0000004%로의 확률이다. 이러한 수치는 거의 확률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확률이 주는 행운으로 이 행사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었다고 얘기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개인적인 행운과 영광은 따랐지만, 영광과 불행은 함께 찾아온다는 말처럼 신의 저주인지 신의 눈물인지는 몰라도 성화 봉송 주자 한국 대표로 최종 선발 이후 마지막 종료 시점까지 수많은 일정을 완전치 못한 몸으로 감내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생각하며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아니 용기를 잃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 말씀은 중학교 입학식 날(1968년 3월 5일) 당시 김달웅 교장선생님께서 전해주신 명언이었다. 이 말씀을 전해 들은 지도 어언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영원히 불타오르며 나를 응원하고 있다.

이 위대한 말씀이 있었기에 본인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을 때 회피하지 않는 과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우상으로 생각하고 싶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리라"(하면 된다)라는 말을 인생 슬로건으로 간직한 채, 우리에게 밀어닥친 역경과 고난에 전혀 굴하지 않고 힘차게 달려온 29년(중1~1996)이란 시간이 나에겐 특별했다.

별 자랑스럽지 못한 지난날의 흔적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것 자체가 개인의 인격과 이미지에 큰 손상을 줄 수 있다는 불안한 마음에 쉬쉬하며 지내왔다.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한 치의 거리낌 없이 간직해 온 비밀 1호를 거리낌 없이 밝힐 용기와 각오로 붓을 들었다.

지난 29년 동안 달리기 인생을 설정해서 실천으로 옮긴 나의 비밀 1호를 말씀드리면, 1955년 출생 이후 1962~1968년 동안, 그러니까 초등학교 6년 동안이 나에겐 너무 힘들고 부끄러운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특히 달리기란 낱말을 떠올릴 때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몸을 숨기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추억이 서려 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본인의 학업 성적은 대체로 우수했다.

그러나 학업 성적에 비해 체육 성적(특히 달리기)은 학급 꼴찌를 벗어나 전교 꼴찌로 초등학교 전 과정을 마감했다.

당시 초등학생의 어린 마음이었기에 차마 누구에게 얘기를 못 하다 보니 가슴앓이하듯 아픈 상처만 가득했다.

외관상으로 비치는 본인의 신체 전반에 대한 객관적 체력 조건은 다른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매년 한 번씩 개최되는 가을 운동회를 떠올릴 때면 성인이 된 이 순간까지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부분 일반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가을 운동회에 대해 아름다운 추억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 위에는 만국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더 신나게, 더 힘차게 외치는 가을 운동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을 운동회가 다가올 때마다 엄청난 트라우마가 따라다녔기에 그 운동회가 절대 달갑지만은 않았다.

가을 운동회의 여러 종목 중 전 학년이 의무적으로 참가하게 되는 학년별, 조별 100m 달리기(저학년은 60m) 시간만 돌아오면 두려움과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늘 그랬듯이 매년 운동회 때마다 조별 달리기 대회에서 본인 차례가 다가오면 엄마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열심히 뛰어는 보지만,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6명이 뛰면 6등, 8명이 뛰면 8등으로 꼴찌는 항시 나의 못이었으며, 7등으로 달리는 앞 주자와의 간격도 무려 10m 이상 벌어졌다. 100m도 아닌 5~60m 경주에서 10m의 거리는 엄청나게 먼 거리다.

그러다 운이 좋아 꼴등을 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다 쥐구멍에 볕 든 경우가 간혹 있긴 했었는데, 그땐 앞에서 뛰던 주자 한 명이 경기 도중 넘어졌을 경우다.

그런 천재지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꼴찌 등수만 기록하다 보니 좌절감이 준 그 시간이 어린 마음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달리기 부문에서 꼴찌를 기록한 운동회 행사 중 제일 기다려진 시간은 교장선생님 폐회 선언이 아닌 운동회가 끝날 무렵 총괄 체육 선생님의 마지막 공지 사항이다.

이유인즉슨, 하루 종일 진행된 운동 경기에서 단 한 권의 노트도 수상하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한 격려 차원에서 노트를 한 권씩 성적과 관계없이 나눠주는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회가 진행되는 종일토록 한 권의 노트도 수상하지 못한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서 약 30~40명 정도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단 한 권의 노트를 손에 쥐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 길 고갯마루를 무려 6년 동안이나 넘어 다닌 주인공이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할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열심히 살다 하늘나라로 떠나게 될 순간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고이 간직하며, 가슴에 묻고 가겠노라. 다짐했었는데 ʼ1996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 한국 대표 선발이 끝내 나의 숨겨진 비밀 1호를 만방에 고하고 말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본인에게도 초등학교 6년 과정을 어렵게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비밀 1호가 고민 1호로 바뀌고 말았다.

대한의 남아로 태어나 적극적인 나래도 펴보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서 훌륭한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순간, 주마등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나도 남들처럼 양팔, 양손, 양다리, 양발, 눈, 코, ․귀, ․입 등 다 갖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이냐? 고 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서 근본적인 이 문제점을 풀어 갈 것인가? 라는 상념의 나를 고민 속으로 빠뜨린다.

누군가가 그랬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를 때라고...

이제부터라도 그 말을 거울삼아 저 높은 곳을 향해 도전하는 것이다.

출발점인 지금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을 헤치며 달려가다 보면 차츰 여명이 오면서 훤하게 밝아 오겠지..

그때가 언제일진 몰라도 끝이 보일 때까지 앞을 향해 뛰어보는 것이다.

뛰다 운동장에서 쓰러지면 오뚜기 인생처럼 다시 일어나 뛸 각오를 하며 내일부터가 아닌 1968년 3월5일 중학교 입학식이 끝난 오늘, 이 순간부터 당장 달리기를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져 나간다.

이렇게 결심한 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 끈을 꼭 조여 맨 뒤 운동장을 향해 돌진했다.

체력 극복을 위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동시에 나의 목표도 함께 정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달리기 부분에서 전교 꼴찌로 마무리한 주제에 사춘기니, 뭐니 하는 그런 한가한 낱말들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968년 3월 5일인 오늘, 이 시점부터 향후 10년 후가 되는 1978년 3월 5일에는 육상을 비롯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스포츠에서 최소한 상위 20% 내 (10명이 달리기를 하면 꼴찌가 아닌 2등) 진입 목표를 달성하고 말겠다는 1차 목표를 설정했다.

아울러 6년 동안 달리기 부문에서 전교 꼴찌를 했던 아픈 추억이 가득한 나의 모교 포항 달 전 초등학교를 찾아 29회 졸업생 강 두순이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 부문 전교 꼴찌였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같은 연령대 사람들과 체력 경쟁에서 상위 20% 내의 체력으로 탈바꿈한 모습을 선보이며 금의환향하는 목표까지도 함께 세웠다.

수많은 시련과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럴수록 더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입술을 깨물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 일어서기를 반복해 가는 체력 연마에 몰두했다.

2년 동안 꾸준히 운동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던 그해 가을, 모교 포항 중학교 개교기념일 10km 단축 마라톤 대회(전교생 참석)가 열렸다.

전교 1․2․3학년 전체 1,800명의 학생이 동시에 출전한 가운데 본인은 2년 동안 갈고 닦아온 체력(실력)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새로운 각오로 도전에 나섰다.

호박이 하루아침에 수박으로 변신할 수는 없겠지만, 초등학교 재학시절 6년 내내 달리기 부문에서 전교 꼴찌를 기록했던 나로서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전교 꼴찌가 아닌, 1,500/1,800등이라는 영광스러운 신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본인으로선 정말 대단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10km꼴인 지점을 1,500등으로 통과하면서 느낀 환희와 지난 시절의 애절한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가며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다.

'이렇게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안되면 어떡하지? 이러다 온 동네 웃음거리나 되는 건 아닌가…? 등등으로 괜히 주저하고 망설이는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구나.

강 두순 난 이젠 바보 아니야!'라고 외치며 문책과 질책을 용기와 반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땅에 태어난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밝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할 수가 있었다.

철재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나:엄마, 나 1,500등 했어요.

엄마: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초등학교 시절 언제나 달리기 경주에서 맨날 꼴등 했잖아요,

근데 오늘은 꼴등이 아니고 1,800명이 달려 1,500등을 했단 말이에요.

엄마:1,800명은 뭐고 1,500등은 다 뭐야?

엄마는 아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 이해를 못 하겠다.

나: 사실인즉슨, 오늘 아들이 재학 중인 포항 중학교 개교 기념일이었는데 그런 뜻깊은 날을 맞아 전 학년 단축 마라톤 대회가 열렸거든요.

우리 학교 전교생 1․2․3학년 모두 합해서 1,800명이 한꺼번에 10km를 뛰었는데 그중에 엄마 아들인 내가 1,500등을 했단 말이에요!

엄마:아이코 그랬어?

우리 아들 정말 잘했네, 그러면 앞으론 달리기 경주에서 꼴찌는 안 하는 거란 말이니?

나: 내 사전에 달리기만큼은 이 시간 이후로는 절대 꼴찌는 없습니다.

엄마: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우리 아들 정말 장하다, 최고다!!!

그날 교내 단축 마라톤이 있고 난 뒤 '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라톤을 시발점으로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는 각오 속에서 여기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자신과의 맹세를 한번더 다짐하게 되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라 일컬어지는 육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 농구, 배구, 축구, 야구, 테니스, 배드민턴.. 등등 다른 구기 종목에 대한 두려움도 일순간에 사라지는 새로운 체험도 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허약하다고 느낀 체력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강인한 체질로 바뀌었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던 성격도 어느새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탈바꿈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는 식으로 매일 달리기를 하며 맞이하게 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체력이 완벽하게 갖추어지다 보니 제반 학교생활도 활달하면서도 건강한 이미지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군(공군) 입대 시 공군교육사령부(공군 훈련소) 연병장에서 체력 검증에서 오래달리기 2,000m 종목에서는 우리 조 30명이 뛰는 가운데 당당히 2등으로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1등과는 거의 반보 차이로 아깝게 2등이 되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6년 동안 전교 달리기 꼴찌이었던 본인 입장에서는 대성공이라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실시한 다른 체력 검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본인이 간절히 원했던 공군에 지원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공군에 입대한 이후에도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 부분 꼴찌 인생이었던 내가 공군 전역 이후 대한항공에 입사한 1981년도에 중. 1 시절 자신과 약속했던 상위 20% 이상의 체력을 유지함으로써 자신과의 약속을 당당히 지켜냈다.

내게 주어진 대한항공 울타리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전국 어느 곳이든 달리기를 비롯한 스포츠 행사가 열린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모든 일을 미뤄 두고 현장으로 바로 달려갔다.

1981년 대한항공에 입사 이후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한국 대표로 최종 선발될 때까지 16년 동안 경주 동아 마라톤(하프 코스)을 비롯한 크고 작은 각종 달리기 대회, 지역별 건강 달리기 대회 등등에 수백 번 이상 참가 기록을 남겼다.

그런 달리기 삶 속에서 육상경기 레이더망에 포착된 '1996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한국 대표 선발'이란 과제 역시 본인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인생 삶의 일부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주최 측의 선발 방식에 따라 ʼ96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최종 선발된 후 태릉 선수촌에 입교하여 전반적인 신체검사, 체력 테스트까지 마친 후 최종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그러고 난 1주일 후, 갑자기 달갑지 않은 불청객 급성 맹장염이 찾아와 본인이 나아가고자 하는 앞길을 가로막는 엄청난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지체할 일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급히 수술을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질병 중에서 제일 쉽다는 맹장 수술이라고 하는데 그 쉬운 맹장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까지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찌하리오! 맹장염 재수술까지 받은 몸으로 미국 출발 1주일 전 서울 힐튼호텔에서 진행된 발대식까지 당당하게 참여했다.

수술 상처가 30%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수 겹의 압박붕대를 맨 채 미국으로 출발해야만 했다. 그런 상태에서, 올림픽 주최 측의 홍보 차원에 따라 미국으로 출발하는 여행 항공노선마저도 서울-애틀랜타 간 직항노선이 아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구-서울-포틀랜드-댈러스-애틀랜타-워싱턴 D.C를 경유하는 장장 23시간이 소요되는 노선이었다.

수술의 상처와 장거리 여행으로 여독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몸으로 미국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정에 참여해야만 했었고, 1.2km 성화 봉송 후에는 250여 명의 미국 시민들을 향해 사인 행사까지 진행했다.

19ʼ96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행사는 한고비, 한고비마다 그 상황에 뛰어든 본인에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천재지변이었다.

한 개의 관문을 힘겹게 통과하면 또 다음 관문이 내 앞을 가로막고, 그다음 관문을 통과하고 나면 또 다음 관문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난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도 않는 전력 질주로 최종 관문까지 무난히 통과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더 큰 이유는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이겨내고야 말겠다.'던 20여 년 전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자신과 체결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내게 어떤 상황이 닥쳐온대도 전혀 굴하지 않고 당당히 싸워 10년 후 나와 같은 연령대에 놓인 사람들과의 운동 및 체력 경쟁에서 상위 20% 내에 꼭 진입하고 말겠다는 그 맹세. 와 그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차디찬 엄동설한 속에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내며 피어난 한 송이 들국화처럼 나 또한 그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본인과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진실을 이 자리를 빌려 만인 앞에 밝히고 싶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말이 있다. 비록 내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처럼 위대한 업적의 위인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일반 보통 국민 중 한 사람으로 나아가리라.

올림픽 100주년 기념 이벤트 행사에 대한민국 대표를 넘어 지구촌 IOC 250개 회원국(약 60억 인구 중 2,500명 초대)이 뽑은 지구촌 대표 성화 주자 중 한 사람으로 96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조직위원회 GUIDE BOOK에는 대한민국 대표 성화 봉송 주자 참가번호 55,168번 강 두순 이란 이름으로 등재되어 '1996 애틀랜타올림픽 역사 기념관에 영원히 보존될 기록을 남겼다.

Mr. kang, Doo-Soon(55,168) -torchbearer(KOREA) 란 글귀의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로….

초등학교 6년 동안의 달리기 꼴찌 이미지 삶을 극복하기 위해 29년이라는 긴 세월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직 달리기 하나에만 포커스를 맞춰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때론 울면서, 때론 넘어져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치면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달리고 또 달렸다.

숱한 시련의 날들을 인내로 극복해 낸 소박한 삶 속에서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던 날, 하늘의 영광과 땅의 기쁨이 주는 감동의 눈물이 앞을 가릴 수가 없었다. 단지 노력의 결과가 가져다준 일취월장이라는 감회 속 진솔한 마음 하나만을 가슴에 담고 살아온 후회 없는 삶의 역사이었다는 사실을 감히 말씀 올리고 싶다.

정말, 진실한 마음속 고마운 마음과 감사의 마음뿐이다.

이 감사 의미 중

첫째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본인에 대한 감사이고,

둘째는 대한민국이란 약속의 땅에서 함께 열심히 살아온 대한민국 모든 국민(1세~100세)에 대한 감사이며,

셋째는 지구촌 250개국의 전 세계인에 대한 감사다.

이제 본인에게 남은 이후 시간은 지금까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삶 플러스 내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도전이라는 철학을 갖고 포기 없는 오뚜기 인생으로 더 알차게 보람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리라

~1996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한국 대표를 비롯하여 지구촌 IOC 250 회원국 성화 봉송 주자 국가 대표님 모두를 향해 FITING!!!~

제 2편, 그 날 이후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봉송을 성황리에 마무리하고 우리나라로 금의환향한 이듬해 1997년 11월, 누구 예측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IMF 외환위기가 세찬 한파를 뚫고 가속 페달을 밟으며 우리 대한민국에 상륙했다.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밀어닥친 IMF 외환위기 한파의 거센 파도가 위상이 높아져 갈수록 우리 대한민국의 근로자들은 길을 잃어버린 새끼 사슴의 신세가 되고 만다.

대한민국 땅에 존립하는 모든 기업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동분서주 바쁜 나날의 연속이다. 구조조정이라는 운명 앞에서 모든 근로자는 숨소리마저 낼 수 없을 정도로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긴장 속의 나날이다. 1981년 9월 9일부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입사했던 대한항공이란 회사 역시도 어언 17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의 심정은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종신직이라 생각하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지만, 우리의 직장 대한항공도 IMF 외환위기가 가져다준 구조조정의 민감한 상황 앞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IMF 외환위기 관련 방송 뉴스가 나온 지 며칠이 지났을까? 대한항공 본사로부터 구조조정 차원의 정리해고 관련 문서가 본격적으로 하달되고 있었다. 문서 내용에 의하면 대한항공 전체 임직원에게 공동으로 적용한다는 차원의 문서이니만큼 열람이 있고 난 뒤 필히 개인별 서명을 하라는 상부 지시사항이다. 아니 상부 명령이란 내용이 더 정확하다. 그 문서 내용에는 IMF 외환위기 속에서 대한항공이라는 회사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골자는 대한항공 직원 중에서 약 10%(1,500여 명) 이상 구조조정 차원의 희망퇴직 신청을 받겠다는 내용이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건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나 다름없다. 대한항공 본사 차원에서 제시한 소속 직원 10%에 해당하는 정리해고 대상 조건은 이러했다.

첫째 회사 근속기간이 10년 이상인 직원,

둘째 직급이 대리급 이상인 직원,

셋째 주민등록상 연령이 만 35세 이상인 직원 중에서 어느 한 조항이라도 해당하는 직원이면 상부 결재 필요 없이 사직서를 작성 후 대한항공 본사 총무본부 FAX로 전송하게 되면 선착순 1,500명을 우선 처리할 방침이란다.

그리고 추후 몇 차에 걸쳐 희망퇴직 추가 신청을 더 받을 계획이지만, 이번 1차 희망퇴직 신청직원에게는 남은 재직기간에 따른 별도의 가산금이 지급될 예정이지만, 2차 신청직원부터는 가산금 지원 계획이 전혀 없다는 내용도 꼭 참고하라는 전문이다.

마지막으로 퇴직을 희망하는 직원은 오늘부터 1주일 동안 사직서를 신청받게 된다는 내용과 함께 희망퇴직 확정 날짜는 3개월이라는 유예기간을 거친 후 1998년 03원 31일부 대한항공 회장 명의로 일괄 처리된다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소름 돋는 문서가 대한항공 전 직원을 향해 긴급 하달된 것이다.

내가 포함된 대한항공 직원 모두는 꿈에조차도 상상하기 싫은 이 내용의 문서 내용이 제발 현실이 아닌 꿈이 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 사건은 제일 가까운 곳으로부터 현실화하여 우리들의 가슴을 조여 오고 있었다.

이 내용의 문서를 접한 항공사 직원 모두의 마음은 한결같이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문서에 표기된 내용을 요약해서 보게 되면 갓 입사한 신입직원을 제외하고는 그룹 전 직원이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는 걸로 해석이 가능하다. 순간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심리적 압박이 조여 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본사로부터 하달된 문서 세부 내용을 세세히 보면 2차 희망퇴직 신청자부터는 가산금마저 단 일 원 한 푼 지급되지 않는다는 강경한 회사방침이 아니던가!

착잡한 심경으로 잠 못 이루는 악몽의 시간 속에서 뒤척이다 새날이 밝았다. 달갑지 않은 회사 출근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려니 오늘따라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하는 수 없이 착잡한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해서 옆 동료들의 곁 눈치를 살펴본다. 모두가 한결같이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꺼칠한 모습의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아침 09:00 시 업무 시작을 알리는 타임 벨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대한항공 본사로부터 수위가 한층 더 보강된 구조조정 문서가 추가로 하달되고 있었다. 내용을 보니 전날의 문서보다 더 자극적인 내용을 담아 직원들의 퇴직 결심을 끌어내려는 회사 입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하루하루가 감당하지 못할 공포 분위기 속에 진행된 시련의 연속이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근한 직원을 향해 남은 1주일 동안 집요하게 사직을 유도해 보려는 목적이 깔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인정도 눈물도 없이 소속 직원을 몰아내려는 방향으로밖에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입사 당시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던 대한항공 이란 회사에 난생처음 증오와 원망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회사로 바뀌고 만다. IMF 속에서 회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런 잔인함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처럼 힘도 배경도 없는 민초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체 '계란으로 바위 치는 형국'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흘러 희망퇴직 접수 마감일이 눈 깜작할 새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시퍼런 강물 위에 외나무다리 하나가 걸쳐져 있다. 그 다리 위에서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하는 막다른 길목에 서글픈 마음으로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 발짝을 나아갈 수도 있는 물러설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부처님, 하나님, 천주님, 산신령님,.. 이런 상황에 놓인 저는 도대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현명한 결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외나무다리 위에서 허공을 향해 나의 애타는 마음을 담아 외치고 또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건 물음에 대한 회답 대신 강물이 벽에 부딪혀 얻게 된 상처만을 안고 되돌아온 메아리뿐이다.

"그래~ 내 나이 40대 초반이고 아직 젊은데 이 시점에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서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 살아있는 입에 거미줄 치겠는가? 더 중요한 건 본인 스스로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회사 동료 누군가가 또 가슴 아픈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 될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회사나 주변으로부터 가혹스러운 퇴직 압박으로 더 비참해지기 전에 스스로 결단을 내리자."라는 각오로 닥쳐올 만약의 일에 대비해서 미리 작성해 두었던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최종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그러고는 서둘러 대한항공 본사 총무본부 전용 팩스로 가슴 서린 희망 퇴직서를 제출하고 만다,

그런 악몽 같은 일을 처리하고 난 뒤 지낸 석 달.. 정리해고란 말을 교묘하게 말을 바꾼 희망퇴직을 알리는 운명의 1998년 3월 31일, 동녘 하늘에는 태양이 붉게 떠오를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순간, 학창 시절 심청전에서 읽었던 한 대목이 긴급하게 주마등을 스치며 지나간다. '닭아 닭아 울지 말라, 닭이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라는 구절이다. 앞을 못 보는 맹인 아버지 눈을 뜨게 해 드리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제물이 되어 인당수 푸른 바다로 끌려가야만 했던 효녀 심청의 비통한 마음처럼 17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일했던 직장 대한항공을 떠나야만 하는 야속한 시간이 드디어 내 눈앞으로 달려오고 만 것이다. 당시 내 나이 방년 41세, 대한항공에서의 총 근속 연수는 16.7년, 직급은 차장으로 최종 희망퇴직(정리해고)이란 이름으로 마침표가 찍히고 만 셈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희망퇴직을 당한 그해 본인 가족 상황은 처를 비롯해 1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실직된'1998년 3월, 아들은 고등학교, 딸은 중학교에 나란히 입학하게 된 것이 어찌 보면 꼭 운명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가장인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건넨 입학선물치고는 너무도 잔인하면서도 가혹한 '정리해고'라는 선물을 안기게 된 가슴 아픈 현주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에서 뿜어나오는 깊은 한숨이 흐느낌으로 바뀌면서 눈물바다를 이루고 만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로 태양은 중천에 떠올랐건만, IMF 속에서 막상 일할 곳을 잃어버린 현실은 딱하기만 하다. 곧 지구의 종말이 올 것만도 같은 착각 내지는 착시 현상까지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본인의 실직 사실을 기피하며 직장을 나가고 있는 사람처럼 핑계를 구실 삼아 인근 야산 산행도 몇 차례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몇 차례 보았던 그 사람들을 또 만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에 이제는 산행마저도 접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주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방황하기를 몇 개월, 올해 중학교. 고등학교에 나란히 입학한 아들과 딸 앞에 가장인 아버지는 죄인 아닌 죄인 입장이 되어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 끝에 길을 가다 우연히 생활 정보지를 만난다. 그 속에는 실직자를 위한 국비 조리사과정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강 신청을 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대구 지하철 1호선 안지랑역 부근에 위치한 경북과학대학 교무처를 망설임 없이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행정실 담당자와 간단한 상담 절차를 밟은 후 곧바로 수강 등록 절차를 마무리했다.

'1998년 5월 1일, 경북과학대학에서 진행하는 제1기 조리사과정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식 조리사과정 김 귀순 담임 교수님께서는 강의에 앞서 우리 수강생 40명(남자 수강생 3명 포함)을 향한 첫마디 인사를 이렇게 시작하셨다. "IMF라는 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시대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목표를 반드시 만들어 낼 것으로 장담합니다. 이곳 교육장에는 전직 대기업 간부 출신 3분의 남자 선생님께서도 수강을 위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 함께 박수로 환영합시다. 짝짝짝! 잘 오셨고 잘 선택하셨다는 말씀을 꼭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배움이 훗날 선생님들께 영광의 잔여물로 남을 수 있도록 과정 교수로서 최선 다하겠습니다."라는 소감까지 밝혀 주셨다. 그러고 난 후 나를 향해서는 더 특별히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주문인지는 몰라도 "강두순 선생님을 제1기 조리사과정 대표로 선출하겠습니다. 모든 수강 선생님 한 번 더 큰 박수 보내주세요"라는 말씀이 아니던가! 본인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씀이 전달되는 과정이다 보니 순간적으로 멍해질 수밖에 없다. 이일을 어떡하나? 추후 조리사과정 대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정에서 한순간도 발을 빼지 못할 입장이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 꿈을 일궈내라는 교수님의 배려라 생각하고 열과 성을 다해 나가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애초 한식 조리사 입문 단계에서 여자도 아닌 남자의 몸으로 음식 조리가 웬 말이냐?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담임 교수님의 강한 의지에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면서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러면서 자신이 처한 이 현실을 좀 더 냉철히 비교·분석을 해 보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그럼 그렇지, 지금 나의 입장에서 쌀밥, 보리밥 가릴 상황이 아니고 주어진 이 과정을 어떻게든 훌륭히 이수한 후 꼭 자격증을 획득, 제2의 인생을 펼쳐 나가리라는 남다른 각오와 포부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시간은 흘러 6주 교육 과정도 어느새 반환점을 돌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한식 조리사라고 하면 우리가 가정이나 식당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식단이다 보니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한 것이 다였다. 그런데 모든 과정이 그러하듯 한식 조리사 과정의 공부를 진행하다 보니 이 과목 역시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큰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중요한 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하찮은 일이라도 적당히 생각해서 임하다 보면 추후엔 감당하지 못할 시행착오와 함께 큰 낭패를 겪게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IMF 외환위기는 한순간도 나와 내 주변을 조용히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98년 3월 31일 IMF 외환위기로 인한 희망퇴직 당시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들과 딸을 이장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1984년생 딸은 공부보다는 음악, 무용, 체육…. 등 예체능 쪽으로 정서가 활달한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이었기에 아들과는 생각의 범위가 달랐다. 그런 유전인자를 지닌 딸의 타고난 소질에 대한 예체능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부모 입장에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시작 단계였던 대한민국 여자축구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대구 안심 여중, 대구 동부여고를 거쳐 경희대학교 체육학과까지 무난히 졸업할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에 최선을 기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한민국 여자 축구선수로 꾸준히 활동하다 현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현모양처 주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딸의 현주소다.

운동하는 시절에는 딸이 소속된 학교생활 주변에서 거의 10년 넘게 학부모 후원회장 자리에 머물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특히 전지훈련이나 각종 대회가 열리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응원에 박차를 기했던 지난 순간순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한 과거를 회상해 볼 때면 아련한 꿈만 같은 시간이지만 진행 과정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여러 차례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축구 운동 이전에는 여자의 몸으로 약 1년 정도 유도라는 종목의 운동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남짓한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대구시장 배 체급별 전국 중·고 유도대회가 열린 준결승 경기에서 상대 선수로부터 누르기 한판패를 당하던 날이다. 경기 도중 상대 선수로부터 온몸으로 눌림 한 판패를 당하면서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어버린 딸을 구급차에 태운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었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가슴 조아리며 당황했던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할 정도로 기억조차 하기 싫은 순간으로 남아있다.

또 한 번은 경희대에 최종 합격한 딸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H 캐피탈 회사에 자금을 신청한 일이 있었다. IMF 상황 속에서 가정 형편이 어렵다 보니 학자금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정해진 날짜에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다 보니 대출해 준 H 캐피탈 회사 직원으로부터 우리 부녀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언어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던 가슴 아픈 일이다.

끝내 아버지와 딸은 동반 신용불량자 자리를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한 채 인내심 하나로 버티어 내야만 했던 가련한 지난 시절의 현주소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암울해져 온다. 마지막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신용회복위원회의 중재 역할로 채무조정의 원금과 이자 모두를 7년(84회)에 걸쳐 상환하고 난 후에서야 신용불량자라는 고통 속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시련이라면 시련이랄 수 있는 고통 속에서도 굳건하게 견디어 준 딸이 대견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부심이 아닐까?

딸의 근황에 이어 한 집안의 기둥으로 여겨 온 1982년생 아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 10년 동안을 학교 내신성적 상위 1%대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직장 대한항공으로부터 IMF 외환위기 희망퇴직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아들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IMF가 낳은 또 하나의 희생양 탄생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IMF 외환위기가 한창 진행되던 그해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다니던 회사로부터 희망퇴직(정리해고)을 당했었고 하나뿐인 아들은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하게 된다. 조금 소심한 성격을 지닌 아들이다 보니 아버지의 대한항공 정리해고 소식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아들로서는 중심을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꾸준히 상위 1%를 유지해 온 성적은 한순간에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면서 학교생활 자체에 해이를 느끼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중학교 졸업 시까지 상위 1%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온 아들이었기에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 생각까지도 최소한 연. 고대 아니면 육사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갑자기 밀어닥친 IMF 외환위기로 집안 경제 상황을 고려, 대학 쪽보다는 육군사관학교 쪽으로 진로를 희망해 온 믿음의 아들에게 안타까운 현실은 차마 눈 뜨고는 바라볼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렇게 변해버린 아들이라고 해서 우리 집 아들이 아닐 수도 없지 않은가? 라는 부모 입장을 모아 방황하는 아들을 향해 설득하고 또 타일러 최소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졸업장은 간신히 받긴 했었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졸업 한 달 만에 무단가출을 시도해 버린 아들이 아니던가!

가출 석 달 만에 광주광역시 광산 지구대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후 곧바로 광주로 달려갔다. 그곳으로 달려가 석 달 만에 만난 아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상태로 되어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이력치고는 너무도 허망하기 그지없는 가혹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아들을 대구 집으로 데리고 돌아와 밤새 뜬눈으로 눈물 지새우며 보낸 다음 날 하는 수 없이 정신병원을 찾아 전문의와 상담 절차를 밟게 된다. 주치의 소견에 따라 일단 대구 대동병원에 입원시킬 수밖에 없는 딱한 순간을 맞이한다. 그날을 기준점으로 해서 '1999년01월1일부 부곡 정신병원으로 병원을 옮겨 요양을 진행했다. 그런 상태의 아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창원 기능대학 컴퓨터 응용 금형 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 학과 개강 시즌에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대학 측에 협조받아 조처했고, 방학이 되면 다시금 병원으로 되돌아가 입원 요양을 이어가는 생활을 만 2년 동안 병행해 나갔다. 특히 병원 요양 생활 중에는 병원 자체 프로그램에 충실하면서 주간에는 주유소 급유 알바 근무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일부분이었지만 학비 보탬이라는 정성이 합류되었다는 점에 작은 위안으로 삼고 싶다.

그 당시 정신병원 입원 중인 아들을 대학에 입학시킨 그 일이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잘한 일 중 하나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섰던 이유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날이 왔을 때, 아들 스스로 자립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병환의 아들과 간호사 아버지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눈물이 뒤범벅될 정도로 갖은 정성을 기울여 달성한 '대학 학위증'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고 있다. 비록 전문학사 학위증에 불과하지만, 그 부분마저도 인고의 눈물 속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아버지와 아들의 억척같은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곡식이나 나무를 심는 일은 모두 사람을 심는 일 곧 인재를 양성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일은 국가의 미래가 걸려있는 일이니만큼 100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말이 탄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비록 아들이 장애를 지니고는 있지만 참사람 육성 차원의 교육을 위해 나부터, 내 주변 우리 가족부터 먼저 실천해 나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이 순간 자신이 달려가야 할 또 다른 인생길을 생각해 본다. 미흡한 나의 작은 힘이라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지구촌 끝까지 내 영혼을 불태워 참사람 육성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마음으로 내 영혼이 다하는 그날까지 열정을 다 바칠 각오로 전력투구하리라.

어느 집안이든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정상적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 가족 구성원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리는 게 사실이다. 그럴수록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할 가장으로서 용기와 신념을 갖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리라는 각오 하나로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친 역경의 고난 속에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의 아들은 소규모 직장에서 소일하며 병원과 직장이 연결되는 이원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아들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면 IMF가 낳은 또 다른 한 사람의 희생양 탄생이 아닐까? 하는 애절한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잃어버린 과거 시절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절규의 한숨이 휘몰아칠 때도 있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그 말의 의미를 간직한 채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만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 중 전부가 아니기에 오늘도 희망의 끈을 움켜잡고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란하게 떠오르는 일출과 함께 내일의 일상을 꾸려가기 위해 최선 다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IMF라는 폭풍우가 휘몰아친 지도 어언 2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갈등과 번뇌 속에서 '2013년부터는 직장과 가정의 패턴을 조금씩 바꿔 가는 방향 설정에 나섰다. 바뀐 패턴이라는 것이 바로 시간이 허락될 때면 마음속에 간직된 글을 써 보겠다는 집념 그 자체였다.

본인이 더 용기를 갖고 문학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굳이 설명한다면

첫째는 글 쓰는 순간만이라도 병원과 가정 그리고 직장의 삼원화 생활을 하는 아들의 안타까운 현실에서 잠시라도 해방되어 글에 집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고,

둘째는 본인의 고등학교 재학시절 국어 선생님이면서 당시 우리 반 담임선생님으로 계셨던 방진우 담임선생님의 문학 예찬론 덕분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겉으로 드러난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생님께서는 모든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꿈을 펼쳐내신 후 마지막 중등교사 임용고시에도 무난히 합격하셨다고 한다. 그러신 후에는 경북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저의 모교 포항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까지 재직하신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그 정도로 훌륭하신 선생님을 뵈면서 고등학교 시절 본인이 느낀 부분은 훗날 대학에서 국어국문학 전공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큰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분명 오늘날 국어 선생님처럼 잘할 수 있으리라는 의지와 용기를 얻게 된 경우였다.

하나의 추억으로만 간직해 온 학창 시절의 꿈도 과거 속으로 흘러가 버린 그 어느 주말 오후, 나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가 불쑥 우리 집을 찾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그 지인이 던진 한마디! '1996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봉송 참가에 대한 기행 회고록 책을 한번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의아했지만 끝내 그 지인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렵게 붓을 잡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 순간이 나에게는 문학의 세계로 새롭게 발돋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방향 제시가 된 부분이라 하더라도 도서 출간을 위해서는 최소 A4용지가 200장 이상이라는 장문의 글을 써야 하는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말이 쉬워서 도서 출간이지 한 권의 책이 시작 단계에서 완성단계까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먼저 얼개부터 차곡차곡 준비한 후 총체적인 줄거리를 형성한 뒤 소 재목 하나하나까지 정리해 나가면서 문장을 써 내려가야 한다. 그 일이 하루 이틀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 길게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무자격자인 내가 도서 출간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를 제삼자가 보았을 땐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단 시작은 해 보아야겠다는 의지와 집념을 불태웠던 의지의 사나이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 그런데 막상 시작을 알리는 서두의 글 몇 장을 써놓은 원고를 퇴고 차원에서 검토해 본 결과 본인이 생각해 보아도 너무도 창피한 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섰다가는 지우고 섰다가는 또 지우게 되는 반복적 상황에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포기와 진행의 갈림길에서 사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쳐 힘들어할 때마다 처음 동기를 부여했던 지인이 찾아와 나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용기를 심어 주곤 한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 준 지인이 어느 날 진행과 포기의 갈림길에 선 내 앞에 나타나서는 작심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믿고 있었던 지인의 행동에 나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나를 향해 반신사적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던 그 친구가 남긴 발언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대한민국 땅에서 누구보다 인내와 끈기가 강한 사람이 내 친구 강두순인 줄 알았는데 내가 사람 잘못 보았나 보다. 정승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라 하지 않았나? 친구가 글 쓰는 걸 포기하는 것 역시 본인 당사자 마음이니 알아서 하시게나…. 그렇지만 분명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하길 바라네. '시간은 절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말을….

그 일이 있고 난 뒤 2년이란 기간을 오기로 버티면서 엄마 젖 먹던 때 힘까지 동원해서 그 지인이 보란 듯이 글을 쓰는 데 집중했다. 주경야독이라는 집념과 불굴의 의지로 문학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나갔다. '하면 된다.'라는 의지 하나로 임하긴 했었지만, 전자에 말처럼 출간의 문턱이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는' 오뚜기 인생 연출을 본인 문학에 접목해 나갔다. 포기 없는 인생의 뒷받침 속에 끝내 자신에게 영원히 간직될 새로운 문학의 이정표는 하루가 다르게 새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증표가 바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원고 분량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운명의 2015년 10월 15일, 주경야독의 2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온 정성을 기울인 결과 나의 분신 '진실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약속'의 탄생을 알리는 출판 기념회 날이 밝았다. 작가의 의미가 담긴 240쪽의 문장을 누구 도움 하나 없이 본인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결과 앞에 깊은 감동을 세기고 싶은 오늘이다.

특히 이날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의 기준점이 된 축복의 날이었기에 기쁨은 남달랐다. 도서에 표기된 글 주재가 '1996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봉송 기행 회고록으로 '생애 최고의 순간들' 을 '진실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틀에 담아본 새 이름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 아니던가!. 본인의 처녀작품이기도 했던 이 도서가 '2016 세종도서 문학 부문 후보 '0'순위에 오를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했다는 사실을 주변 지인들을 통해 듣게 된 순간 감동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직장 생활과 병행해서 2년 6개월이라는 기나긴 여정 속에 써 내려간 원고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성을 이룬 '하면 된다'. 는 불굴의 의지가 만들어 낸 승리의 기쁨 그 자체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2016 세종도서 후보에는 올랐어도 최종 선정에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순수한 아마추어가 발행한 본인의 처녀작품이 '2016 세종 도서 문학 부문 후보에 진입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본인의 영광을 넘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 책이 나의 보금자리에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점점 나락의 늪으로 떨어져 가는 본인 앞에서 '시간은 절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져 버린 나의 둘도 없는 지인의 그 한마디가 있었기에 도서 출간이라는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긴 시간 동안 행방을 감췄다가 출판 기념회 장소에 나타나 뜨거운 마음의 축하를 아끼지 않았던 그 지인이 오늘따라 너무도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상 전체가 포기한다 해도 내 친구 강두순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라며 힘찬 브라보를 외치는 그 친구보다 이 세상에 더 멋진 사람은 정녕 없을 것이리라

힘겨운 순간순간이 합쳐 만들어 낸 도서 출간이라는 그 기세를 몰아 바로 '2016년 3월 대구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과 지성'이라는 문학 동아리에 입문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수필 동아리 입문 순간부터 03년의 기간 동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삶의 현장을 주옥같은 황금알로 가득 채운 100여 편의 창작 수필을 작품으로 만들어 냈다. 작품 활동 03년 동안 진행된 각종 전국 공모전 수상 기록은 '2016 사랑을 나눠요 #온기 톡톡 국민연금 사연 공모전- 글제: '국민연금 반납 제도는 행복의 길'이란 작품으로 전국 최우수상-을 출발점으로 크고 작은 문학상에 도전해서 30회 이상 수상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문학 동인지 '수필과 지성' '수필 사랑' '풍경 문학' 그리고 '문예 창작' 등의 계간 문학 동인지에 나의 글이 30여 편 발표를 하게 된 나의 문학 인생이었다.

이 시간 이후 본인의 각오는 어떤 시련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본인이 추구하는 수필 문학을 지속해 다져나갈 각오로 하루하루의 삶을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은 글로 답할 것을 만인 앞에 약속한다.

본인의 수필 문학관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인생은 수필이고 수필은 인생이다.'라는 슬로우 건으로 나의 운명이 다하는 영원의 그날까지 지평선 아래 펼쳐질 문학의 글 밭을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이어 가리라.

'無償 속에 걸어온 길' 을 마무리하면서 개인의 소견을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밝히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아오면서 본인이 체험한 이웃사랑의 증표로는 헌혈 35회의 실천과 일일 일선의 생활화를 기본 개념으로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이 다다. 뒤늦게 만학도 위치에서 사회 복지사, 요양 보호사 과정을 공부한 배경 역시 이웃사랑 방법을 제대로 알고 실천으로 옮기며 살아가기 위한 방향 전환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고 싶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떠날 인생'이기에 이 땅에서 나의 삶이 마무리되는 그날이 오면 수필 문학을 비롯한 내가 가진 모든 걸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께 전수한 후 처음 왔던 길로 조용히 떠나리라는 처음 마음 그대로다. 그러기에 나의 삶에 관한 방향은 누구 앞에서도 초지일관 같은 길일 수밖에 없다. '나 하나쯤이 아닌 나 하나부터'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살아왔고 추후 남은 삶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 낮은 자세로 임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동녘으로부터 여명이라는 밝은 사회가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으리라는 생각 하나로 오늘을 설계해 나간다.

각별하게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민건강 강의에 심혈을 기울여 오신 故 황수관 박사님 강의 중에서 몇 차례 강조하신 '유언'이란 낱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황 박사님의 말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나 스스로 작성된 유언장을 항상 안 주머니에 지니고 다닌다. 제삼자가 보았을 땐 무슨 대단한 유언이기에 늘 안 주머니에 소지하고 다니는 걸까? 라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나만의 방식에 따라 작성된 유언장이기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다. 나는 내 삶이 다 하는 그날이 오면 나의 신체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기는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기증할 것이고 그 외 나머지 신체는 의학 실험용으로 증정한 후 빈손으로 떠날 것이다"란 그 말이 유언장에 쓰여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참으로 위대한 유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이런 위대한 생각은 황수관 박사가 아니면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유언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순간 주마등을 스치며 지나가는 중심에 내 마음이 멈춰 선다.

난 철학인 이나 종교인이 아닌 평범한 일반 시민이다.

오늘 故 황수관 박사님 강의를 듣고 난 이후 내 마음의 최종 결심을 이장에서 밝히고자 한다. 지금까지 본인은 황수관 박사님처럼 개인 생각을 유언으로 남겨놓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 많은 사람 앞에 남긴 이 글이 나의 유언을 대신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이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볼 때면, 본인이 가진 능력 이상으로 사회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으며 살아온 게 사실이다. 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라도 '본인의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결정을 이 자리서 내리고 싶다. 내 생애 이런 고귀한 결정을 내리게 된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행복한 시간은 절대 없을 것이리라.

내 삶이 다 하는 그날이 오면 나의 장기가 필요한 곳에는 장기 기증을, 신체가 필요한 곳에는 신체 기증까지 행동으로 보여주리라. 그다음 남은 잔여 신체는 수목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줌으로써 마지막 자연으로 돌아가는 굴레 속으로 내게 주어진 이웃사랑을 마무리 한 후 처음 왔던 그길로 조용히 떠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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