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3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삶의 수레바퀴' - 강정희

강정
강정

난, 연분 섞인 젓 내음이 가슴을 한 컷 부풀게 하는 항구 도시 여수에서 태어났다. 너그러운 바다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갑갑할 때 바다를 찾으면 여지없이 속 시원하게 트임은 놀라울 정도다. 파도 소리는 같이 있자고 날 붙들기도 했다. 어느 시인은 바다가 죽으면 가슴도 죽는다. 고 했다. 여수에 살면서 늘 바다를 보는 것, 자체를 고맙게 생각했다. 작은 섬 오동도의 동백꽃은 빼어나게 향기를 지닌 꽃은 아니지만, 눈발을 헤치고 해맑은 자태를 드러낸 꽃을 보면서 길손이라면 너나없이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을 맛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완고한 집안의 팔 남매에 막내, 늦둥이로 태어나서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엄마는 나의 보호막이었다. 막내는 어느 자식보다 부모와 함께 사는 기간이 짧아서 더 특별하게 사랑을 받게 되는 게 아닐까? 한편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하는 게 막내들의 특성인가 싶다.

우리 부모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고 엄마는 결혼 후 종갓집 맏며느리로 집안 살림을 하며, 자식들을 키우시며 아버지를 내조하셨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시고 당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셔서 우린 항상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꼭 아버지라고 불렀다. 반면에 내게 어머니는 엄마였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매보다는 부모님의 삶을 통해 성실과 정의의 노력을 외면하지 않는 올곧음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마흔두 살이었다. 두고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이번에는 사내아이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줄줄이 여섯 번째 딸이 태어나서 실망이 크셨다고 하셨다. 난 잔병 없이 잘 자랐고 나의 이름보다, 막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가 더 많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선생님들의 귀염을 잔뜩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마치 여름날의 꽃밭처럼 화려하면서도 긴장된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당신에게 폐가 되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으셨으니,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면 안 된다. 언제나 모범생으로 행동해야 한다. 는 생각이 항시 날 동반했다. 난 어쩜 아버지의 감시 속에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눈치가 빨랐고 사리 판단을 정확하게 하는 방법을 빨리 배운 셈이다. 어릴 적 내 이름 뒤에는 늘 '강 교장 막내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그것이 든든한 배경임과 동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버거운 짐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단독주택이었지만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기 때문에 상당히 비좁았다. 엄마, 아버지 그리고 우리 자매 넷, 큰오빠네 식구 여섯, 그러니까 모두 12사람이었다. 마당이 꽤 큰 편이었고 엄마, 아빠가 쓰셨던 방, 오빠네가 쓰셨던 방 그리고 우리, 네 자매가 맨살을 비비대며 함께 지냈던 방, 그리고 두 방 사이에 큰 대청이 있었고 정갈하고 넓은 마루가 있었다. 창고 옆에는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화장실은 집 밖에 있어서 마당을 거쳐 가야 했다. 낮에 귀신 이야기를 많이 들은 날엔 오밤중에 화



장실에 가려면 은근히 겁이 났었다. 우리는 일요일마다 목욕했다. 아버지, 엄마부터 시작해서 큰오빠 올케 그리고 언니들, 그러니까 계급의 서열처럼, 어른들이 먼저 하고 아이들은 맨 나중이었다. 우리 집 목욕탕은 대중목욕탕에 비교하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욕하고 나면 개운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앞뜰에는 꽃밭이 있었고 집 뒤에는 장독대와 우물이 있었다. 지난날 장독은 우리 가정의 생활필수품이었다. 엄마와 올케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간장이며 고추장을 덧붙이기 위해 그곳을 오갔다. 그리고 매일 우물물을 길어 하얀 행주로 장독을 닦으며 장맛이 변치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식구들이 건강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꽃밭은 아버지가 가꾸셨는데 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정서를 다스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정열적인 빨강 칸나꽃을 비롯하여 꽈리 나무, 금 송아, 백일홍, 깨꽃, 분꽃, 채송화꽃, 봉숭아꽃들로 가득 찼다. 찔레꽃은 우리 집 울타리를 타고 양쪽 대문을 화려한 분홍색으로 장식하여 귀가하는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을 반겨 주었다. 저녁엔 큼직한 평상에 누워 엄마는 냅다 모기를 쫓으시고 우리는 반짝이는 밤하늘의 엄마별, 아기별을 찾았다. 우리 집의 봄여름은 늘 풍성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지금도 이맘때면 내 어릴 적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른다. 기억 조작이 아닌 추억을 되씹으며 살아감은 큰 행복이다.

우리 집 마당 빨랫줄에는 풀 먹인 모시 적삼이 널려 있었고 하양 옥양목 이불 깃도 펄렁거렸다. 여름은 언제나 꽃밭 가득한 싱그러움으로 우리 집에 찾아왔다.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밤은 하나의 연중행사였다. 난 그날만큼은 언니들한테 고분고분하게 비위를 맞추며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언니는 꽃잎을 따고, 백반을 넣어 찧었다. 소금을 조금 넣어야 물색이 고와진다며. 봉숭아 잎이 잘 찧어진 후에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에 붙이고 아주까리 잎으로 싸서 동여매 주었다. 잠을 험히 자면 꽃물이 잘못 든다는 주의를 받지 않았음에도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얹고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백반을 넣어서인지 밤 내내 따갑고 쑥쑥 쑤시고 아파서 그날 저녁은 아예 잠을 설쳤다. 치만 아픔을 참고 아침에 일어나서 실을 풀고 예쁘게 물들여진 선홍빛 손톱을 자랑스러워했다. 지금도 이 추억은 정말 금빛 찬란한 보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1964년 2월 한낮에 큰 올케의 비명에 깜짝 놀란 우리는 아버지의 방으로 부리나케 달려 들어갔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금방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으셨던 우리 아버지가 정신을 잃으시고 쓰러져 계시지 않은가. 우린 너무나 당황한 상태여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전화도 없었기에 병원으로 헐레벌떡 로마 병정처럼 달렸다. 그 15분의 시간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모른다. 마침 왕진 중이신 원장님을 뵙지도 못하고 큰오빠가 근무하시는 은행으로 달려갔다. 큰오빠를 보는 순간, 어찌나 서러운지 울먹이며 아버지의 상태를 말씀드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난리가 쳐들어온 것처럼 엉망 진수였다. 정신을 잃으신 아버지는 소변을 가리지 못하셨고 심장박동도 멎은 상태였다. 영혼이 빠져나간 아버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늦게야 오신 원장 선생님이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은 긴긴 동굴 속에 갇힌 것 같은 캄캄한 절망이었다. 사망원인이 심장마비였다고 하셨다. 의사가 빨리 왔다 해도 손을 쓰기엔 늦은 상태였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가실 줄 그 누가 예측했겠는가?



너무너무 허망했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홀로 외롭게 가셨다는 거다. 대가족을 이루고 함께 생활했지만, 누구 어느 한 사람 임종하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슬픈 노릇인가? 요즘 연세 드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자다 죽는 게 소원이라고 큰 복 중에 큰 복이라고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남은 가족으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 역시 다만 며칠이라도 아파서 누워있거나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다가 떠나셨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자란 장조카와 나였다. 마침 우리 둘 다 생각도 고민도 많은 사춘기 단계에 있었기에 더 힘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난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따뜻한 보살핌도 없는 사춘기 시절을 보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 인생에 다가온 최초의 불행이었다. 사춘기는 한창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는 인생의 봄이라는데 난 그렇지 않았다. 조카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소화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했었다. 커다란 지주를 잃은 충격은 생각보다 큰 상처였다.

아버지는 느닷없는 정년퇴직으로 당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시고 끙끙 앓으시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

나의 진로에 대한 상담을 엄마와 큰오빠와 함께했다. 워낙 말수가 적은 오빠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지만, 엄마의 성화는 대단하셨다. 큰오빠 역시 자식들을 넷이나 두셔서 어깨가 축 늘어졌는데 동생들까지 무거운 짐 덩어리로 맡으셔야 하는 현실을 엄마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셨다. 난 인문계로 나갈 수 없으니, 대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난데없는 엄마의 청천벽력 같은 매서운 말씀을 듣고 방을 뛰쳐나갔다. 그동안 진로에 대한 걱정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 내게 이 말은 커다란 쇼크였다. 사람에게 다가오는 결정의 순간은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 번에 여러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거다. 내게 무척 혼란스러웠다. 엄마의 우격다짐은 큰오빠에 대한 당신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나의 꿈을 버리고 엄마와 오빠가 원하시는 대로 직업전선으로 진로를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까지는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나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는 듯, 한동안 들떠 있었던 내 맘은 찬물을 끼얹은 듯 스르르 내려앉았다. 나는 엄마 앞에서 다시는 항변하지 않았다. 꼭 대학을 보내달라고 마지막까지 떼를 쓸 수도 있었지만, 더는 엄마의 마음을 쑤셔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상황을 분별하고 적당한 때에 포기할 줄 아는 철이 든 아이였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우연으로도 부딪칠 수 없는 먼 곳에 계신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난 분명코, 간호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무척 싫어하셨다. 그런데 하필 당신의 막내딸이 간호사가 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텐데 내가 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인생은 자기 몫이 있어서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순천 간호학교는 10대 1의 경쟁률이었다. 시험 치르는 날, 엄마는 꼭 붙어야 한다며 찰떡을 덥석 입에 넣어 주셨다. 그 찰떡 덕분이었는지 어려운 관문을 뚫고 간호학교에 입학하였다. 나 스스로가 택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충실히 공부할 것을 자신과 약속했다. 내 삶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으로 순순히 받아들이며 3년의 과정을 마치고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간호사가 되었다.

1969년 4월, '친구야, 잘 있지? 급히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오늘 꼭 만나고 싶어.'

라는 간호학교 동창의 전화를 받았다. 내 동창이 폐결핵에 걸려 입원실에 갇혀 힘들어할 때 가을날 산책길에서 주운 잔잔한 꼬마 솔방울과 단풍잎을 건네주며 치료의 반은 마음이라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늘 내게 고마워하며 날 믿고 따라주는 친구다. 서독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대문짝만한 신문 광고를 읽었다며 내가 함께 떠난다면 응모해 보겠다고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동창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일주일의 밤번을 마치고 고향에 계시는 엄마를 방문하여 나의 의사를 밝혔다. 엄마는 '네 꿈을 포기하게 하여 등 떠밀어 간호사를 만들었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또 반대하겠느냐? 난 지금도 널 볼 때마다 짠하고 미안하고 죄인이 된 느낌이다.' 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가능성의 지평을 향해 넓은 세계를 보자. 갇힌 공간에서는 갇힌 사고 밖에 나오지 않는다.'라는 지론을 생각하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어릴 때 나는 명작 소설 '알프스의 소녀'를 읽고, 청순하면서도 강한 하이디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언젠가는 알프스의 만년설을 꼭 한번 눈에 담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독일의 부흥이 라인강의 기적이며, 독일을 상징하는 위대한 아버지 같은 깊고 푸른 라인강도 보고 싶었다. 또한, 하이네의 시를 노랫말로 만든 로렐라이 언덕도 즐겨 불렀다. 그렇게 내게 독일의 이미지는 알프스산맥과 라인강 그리고 로렐라이 언덕이었다.

1969년 7월 17일, 나는 200여 명의 간호사와 함께 독일 파견간호사로 김포공항을 떠나왔다. 엄마가 부족해서 내가 간호사가 되었고 멀고 먼 서독으로 떠나는 게 다 당신 탓이라며 곱게 접은 꽃 수건을 꼭 쥐여주며 내 손을 잡고 우시는 엄마는 그날따라 아주 작고 늙어 보였다. 난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전세 비행기에 올랐다. 늦게 사 지그시 입술 깨물며 눌러 담은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포근한 솜덩이 같은 구름 속을 날고 또 날아 20시간 만에 드디어 서독 쾰른·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각 처에서 고용주가 마중 나와 있었다. 같은 병원에 배치된 우리 다섯 사람을 태운 봉고차는 우리가 근무할 병원으로 쌩쌩 달렸다. 고용인이 마치 잘 부릴 수 있는 튼튼한 노예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는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3년의 고용계약으로 생소한 이역만리 독일 땅에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곳은 루르(Ruhr) 지방에 있는 Wetter라는 도시다. 병원은 둘러싼 숲이 있어서 공기가 맑고 조용하다. 송홧가루 날리는 울창한 송림은 가히 일품이고 숲속에서 다람쥐나 노루를 만날 수 있는 풍경은 진정 동화책에 나오는 경이로움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간호과장은 우리에게 병원을 안내했다. 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서독에서 꽤 이름난 병원이란다. 나는 수술실로 배정되었지만, 수술실에서는 환자와의 접촉이 거의 없어 독일어를 배울 수 없다며 손이 부족한 주말에 일반 병동에서 일하라고 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원칙은 같지만 일을 해나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일머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간호사 생활은 '코리아에서 온 천사'라는 독일 사람들의 경탄과는 달리 허드렛일해야 하는 현실과 고독, 두려움, 문화적 이질감에서 오는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의사소통이었다. 지레 겁부터 먹은 난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어쩌다 수화기를 들면 입은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직원들이 웃으면 아무런 뜻도 모르고 눈치를 보며 덩달아 따라 웃어야 하는, 마치 꼭두각시 같은 처세였다. 또 어떤 실수가 생기면 모두 발뺌을 하고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직원들 가운데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리는 바람에 아주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나를 완전히 사고뭉치로 몰아세웠다. 정말 어이가 없어 분노할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다른 방안이 없었던 나는 억울함을 삼키며 안타깝고 불쌍한 꼴이 되곤 했다. 힘없는 내가 미웠다. 근무 중에 어떤 물품을 가져오라 하면 장님이 문고리 잡듯 지레짐작으로 찾아 가져가기도 했다. 틀린 것을 가져가면 사팔눈을 해 보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른다. 소리를 안 지른다고 해서 꾸중이 아닌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를 안 내고 자기네들끼리 한편이 돼서 눈을 찡긋하며 내 실수를 두고 농담한다는 사실이 서럽고, 알량한 자존심이 상하기만 했다. 정말 도중에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모국어라는 것이 밥과 공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으며 악착같이 보란 듯이 독일어를 빨리 배워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간호과장은 부르기 힘들다며 검은 머리 우리에게 수산나, 모니카, 베라, 안젤리카, 클라라로 독일 이름을 붙여 주려고 했다. 우리는 당연히 독일 간호사 이름을 배워 익혀 불러야 하는데 단 한 사람 섞인 한국 간호사 이름을 배워 불러줄 의지가 없음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름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에게서 가장 먼저 부여받는 특권이다. 그 사람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한 인간의 뿌리와 정체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어떻게 엿장수 맘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서툰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서 언어 실력을 총동원한 나의 거센 항변은 간호과장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지만 결국 내 의사를 받아들였다. 사람은 모욕당하면 때로 대담해지는 모양이다.

환자를 간호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눈에 익지 않은 얼굴에 우리들의 체구에 두 배 이상인 환자가 많았고, 정형외과여서 깁스하고 누워있는 환자도 꽤 있었다. 수간호사는 무거운 환자는 절대 혼자 다루지 말라고 했지만, 막상 도움이 필요해서 협조를 청하면 미간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언젠가부터는 동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끙끙거리며 혼자 해냈다. 한국 간호사는 몸집은 작은데 당차고 부지런하고 주사 잘 놓고 친절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동양의 백의의 천사로 알려졌다.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시켜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켜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 간호사들은 솔선수범 일을 찾아서 했다. 빨강 호출 신호가 켜지면 그래야만 한다고 맨 먼저 달려갔고 군소리 없이 다 받아 삼키며 속은 문질러져도 눈물 꽃 살랑대며 고목의 새순 돌보듯 정성을 다하였다.

나와 함께 운명의 배를 탄 한국 간호사들은 남편과 자식을 떼어놓고 경제적인 기반을 잡기 위해 떠나온 나이 드신 분들로 내게 모두 언니 같은 분들이었다. 어린 자식들과의 생이별은 마치 팔 하나를 잃은 기분이라셨다. 언니들은 가족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다. 잠들기 전에 사진 속의 자식들에게 엄마와 꿈속에서 만나자며 입맞춤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올망졸망 아침 인사를 하며 하루를 여셨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에 매달리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베갯잇이 젖도록 흐느끼는 하얀 밤도 있었다, 피부의 대화가 없는 외롭고 힘든 독일 생활이었지만 가족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된다고 가족사진 한 장에 힘을 얻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나 받는 날엔 눈 화장이 범벅되어서 엉망이었다. 소리 없이 촛농처럼 흐르는 눈물을 보며 나도 따라 울었었다. 언니들은 시내에 나가면 아이들의 옷 가게나 장난감 파는 상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글썽이며 멍하니 서 계셨다.

우리는 근무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으레 한국 음식을 해 먹었다.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에 구수한 된장찌개, 달걀 두루마리, 오이무침으로 차려진 저녁상은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보글보글한 된장찌개를 둥근 식탁에 놓고 코를 훌쩍이며 먹고 나면 가슴이 뻥 뚫렸다. 그때는 배추가 없어서 뻣뻣한 양배추를 잘게 썰어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팥소 없는 붕어빵이나 다름이 없지만, 소금과 엄마가 꼭꼭 싸준 고춧가루로만 김치를 담아 먹었는데 입맛은 길들이기에 달렸다고 숙성 기간을 거치면 제법 감칠맛이 났다. 독일인들은 마늘 냄새를 무척 싫어해서 마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마치 미개인으로 취급했다.

근무가 끝난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일주일에 세 번, 독일어 수업을 받았다. 필리핀 간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근무 후의 시간이라 너무 힘들어서 수업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는 다 있었다. 나는 출근부에 도장 찍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수업을 거르지 않았다. 나 역시 피곤한 날은 꾀를 부리고 싶기도 했지만, 우리를 위해 오시는 선생님을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 피곤함에 젖은 얼굴로 수업받으러 갔다. 그래서인지 내 독일어 실력은 꽤 늘어서 3개월이 되니까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었다. 차츰 말과 생각이 트이면서 독일 풍경과 문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독일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적응과 함께 가족과 고향,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커졌다. 부어오르는 그리움을 안고 분칠한 피에로처럼 울다가도 또 웃으며 동료와 함께 수다를 떨거나 귀에 젖은 추억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한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온갖 자태를 취하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아득한 하늘을 보며 나직이 엄마를 부르면 살 것 같았다. 울타리 없는 높고 푸른 하늘은 우리에겐 고향이고 가족이었다. 울어본 사람은 안다. 염원이 깊을수록 그 눈물이 얼마나 쓰리고 외로운지를.

굵직굵직하게 볼펜으로 꾹꾹 눌러서 쓰신 엄마의 편지 내용은 늘 비슷했지만 그래도 손꼽아 기다리다 파랑 봉투를 뜯기도 전에 가슴이 차올랐다. '평온한 바다는 결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 수 없다. 인사만 잘해도 성공이다. 굽혀야 할 땐 굽혀야 한다. 굽히는 것을 못 하면 일평생 넌 못 이긴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이 크다.' 등등 나를 내려 앉히는 잔잔한 감동과 교훈을 전해주는 글귀에 움츠러들기도 하고 혼자서 찔끔찔끔 울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내가 연못가에 두고 온 어린아이처럼 항상 걱정되지만, 엄마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해 나갈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입안의 혀처럼 굴려야 하는 나날이었지만, 봉급 날이면 우리는 모두 만족했고 한 달 동안 겪었던 수모와 아픔을 한꺼번에 씻어버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일한 만큼, 고생한 만큼 버는 정직한 즐거움을 배웠다. 내 동료는 독일 생활 3년 내내 번번한 옷 한 벌 사서 입지 않고 빠듯한 생활비만 제외하고는 남동생의 학비를 닭 모이 주듯이 꼬박꼬박 보내주었고 부모님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도 장만해 드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은 향수나 그리움은 차츰 희미하게 퇴색되고 눈물도 말라 갔다.

가끔 우리 숙소에 찾아온 남자 중에 대한민국의 청년 한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언니들은 교제한다고 꼭 결혼하라는 건 아니지 않냐며 한번 사귀어 보면 어떻겠냐고했다. 그 후에 그가 겸연쩍게 얼굴을 붉히며 똑같은 얘기로 내게 다가왔다. 올곧고 강한 생활관, 몸에 밴 소박한 삶의 태도, 배려심, 가지런한 하얀 이를 내보이면서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교제하는 기간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지만 솔직히 광부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서 어느 것 하나 번듯하게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내 주제는 생각지 못하고 상대방의 여건만 따지는 건 아닌가 하면서 고민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독일에 가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광부들이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에 더 부담되었다. 데이트하면 할수록 외로움이 줄고 즐거워지고 다음 만남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니 이게 바로 내 가슴에 선연한 석류알 같은 사랑이 움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마음이 가는 대로 심장이 뛰는 대로 사랑하면 결혼하는 거라고 아무 조건 없이 마음 하나로 결단을 내렸다. 엄마에게 나의 뜻을 전했다. 사람은 어떻든 간에 광부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실망하신 게 분명했지만, 내색하지 않으시고 혼인은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두 사람이 내 생각을 바꾸고 버리기도 하면서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위해주는 것이라며 현명한 우리 딸은 잘 맞추며 살 거라 믿는다고 하셨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철석같이 날 믿으셔서 때마다 옷깃을 여미게 했다.

내 남편은 1965년 6월, 독일에 파견되어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고 인간 육체의 한계를 실험하는 1천 미터 비좁은 지하 막장에서 5년 동안 석탄 캐는 일을 했다. 갱도에서는 눈과 입만 하얗고, 깜둥이 아닌 깜둥이로 변하여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섭씨 35도를 웃도는 지열 때문에 한 시간도 채 못 돼서 옷이 흠뻑 젖으면 땀을 짜내고 다시 입었다고 한다. 검은 돌에 떨어진 구슬진 땀방울은 반짝거렸고 힘든 날은 더욱더 반짝거려 야속하기만 했단다. 살 떨리는 두려움으로 전쟁과 같은 나날이었지만 뼈가 휘게 참으면서 그날그날이 무사함을 감사했단다.

드디어 1970년 9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을 부모, 형제, 친우들의 축하 없이 외롭게 치른 슬픈 날이면서도 기쁜 날이었다. 이제는 일편단심 정숙하고 지혜로운 아내로 올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았다.

신혼 방도 구해야 했고, 가구와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했고 남편 직장도 찾아야 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남편의 직장을 구하는 일이었는데 마침 기중기를 만드는 큰 공장에 취직되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에게 셋방 주는 것을 몹시 꺼렸다. 병원에 속한 집들이 많아서 방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때마침 병원 지하실에 부엌이 딸린 방이 비어 있다며 지하실에는 환자들이 죽어서 영안실에 안치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지만, 영안실도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방은 하나였지만 꽤 컸다. 침실이 없으니, 침대를 들여놓을 수도 없었고 낡은 소파를 사들여서 밤에는

길게 펴고 잠을 잤다. 옷장은 비닐로 된 값싼 것으로 두 개를 장만해서 양복이나 투피스를 구겨지지 않게 걸어 두었고 속옷이나 양말은 여행 가방에 둔 채 지냈다. 화장실은 있었지만, 욕실은 시설이 좋지 않아서 나는 가까운 간호사 숙소에서 샤워하고 남편은 공장에서 샤워했다. 남편이 밤번을 하는 주에는 어두워지기도 전에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나는 남편이 밤번인 기간이 아주 싫었다. 혼자 지내기가 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주일은 빨리 가지도 않았고 또 그 일주일을 겨우 보내고 나면 3주 후 밤번 날짜는 이상하게도 빨리 다가왔다. 독일인이라면 살 집이 아니었지만, 어디면 어 떠라?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쉴 수 있고 기다려 주는 곳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직원들은 우릴 측은지심 여겼지만, 우리들의 해맑은 함박웃음 꽃은 지하를 뚫을 듯 행복의 파고 波高는 높았다. 우린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대신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었다. 그때는 수판알처럼 계산이 잘 되어 한 달 봉급을 받으면 생활비만 제외하고 고스란히 저축하여 갈수록 저금통장이 불어나고 있었기에 우리 속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명색이 새색시인 난 무릎 나온 운동복만 입고 살았다. 나는 수술실 당직을 도맡아 했고 남편은 10시간씩 일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를 참고 견디는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속 깊은 상처를 꿰매 덮으며 독해야 했고 청양고추 몇 배 더 매워야 했다.

1972년 8월에 첫아들을 낳고 세상을 다 내 품에 얻은 것처럼 너무너무 기뻐서 울었고1975년 8월에는 둘째 아들을 낳고 너무 좋아서 울었다. 퇴원하여 우리 집에 돌아오니 꽃향기 가득했고 아기와 산모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미역국도 끓여 놓고 고슬고슬한 쌀밥도 해 두었고 집안도 말끔히 치워 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밥, 송송 썬 양배추김치 그리고 참기름이 둥둥 뜬 미역국이 식탁에 올랐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게다가 미역국은 어쩜 그리 맛있게 끓였는지 감동이었다. 한 숟갈 한 숟갈 입에 넣는 미역국이 마치 작은 행복을 먹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공부는 자식 키우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나는 유아기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씨를 뿌리고 싹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세밀한 관심과 정성으로 우리 아이들을 키워가겠다고 결심했다. 내 몸이 부서져도 두 아이의 꿈에 날개를 꼭 달아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런 연줄도 없는 혈혈단신 만리타국에서 온종일 근무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아침 일찍이 한창 단잠을 자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씻기고 먹여 유아원에 맡기고 일자리에 도착하면 아직 내 근무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진이 완전히 빠졌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겨울에는 감기에 걸리고, 유아원에서 전염되어 한 아이가 병을 앓으면 우리 아이도 앓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애들이 아프면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애들이 아파서 속이 타기도 했지만, 아픈 아이를 유아원에 보낼 수 없으면 근무를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감기로 열이 오르면 해열 항문 좌약을 미리 넣어 주고서 시치미를 뚝 떼고 유아원에 데려다준 다음 일자리에 가서 중요한 일들을 대충 끝내놓고 눈치껏 빠져나가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찾아갔었다. 그런 잔꾀를 부려야 할 때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려 기침만 콜록거려도 마음 아프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대신이라도 앓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인데 스스로 모진 엄마여야 했던 두고두고 아픈 기억이다. 그래도 완치되어서 또 잘들 지낼 때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었고 고통과 슬픔이 봄날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다. 소리를 내며 토실토실 크는 두 아이는 내게 단순한 자식이 아니라 삶의 윤활유 같은 힘이고 살아가는 희망이었다.

1978년 7월에 수술실 수간호사로 임명받았다. 외국인의 삶은 의지를 결과로 보여줘야 하는 증명의 연속이다. 그동안 내 노력에 대한 일종의 감투상이라고 할까? 너무나 자랑스러운 가슴 뛰는 그 순간, 속 깊은 눈물이 번졌다. 책임이 따르는 벅찬 자리였지만, 이 사회에서 당당한 의지의 한국인으로 새로운 임무를 잘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에도 온도가 있음을 알고 숨길 것이 없을 때 제일 행복한 것같이 속 각각 말 각각이 아닌 나를 내보이고 경쟁이 아닌 협동을 구하며,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으로 솔선수범 일하는 것이었다. 몇몇 독일 간호사들은 언감생심 아니꼽다는 눈치를 보이며 쇠심줄 같은 오기를 부리기도 했다. 내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개천에서 용 난 게 아닌가? 나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한쪽은 미안해하고 한쪽은 이해하려고 애쓰며 더 낮게 더 바싹 다가가 온 정성을 다하여 모서리와 각도를 조절했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재능이 아닌 열정이라고 나의 대단한 열정은 사람을 한군데로 모았다. 난 새벽 날개 치면서 제일 먼저 출근하고 맨 마지막에 퇴근하며 그날의 일 처리를 아귀 차게 꾸려갔다. 물샐틈없는 독일인들에게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기록으로 남겨 실질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공들인 만큼 보석은 꼭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온 힘을 다한 나의 노력이 아니었나 싶다. 난 지금도 하루를 돌아보며 일기를 적는다.

결혼한 지 11년 만에 우리 아이들이 봄 햇살처럼 눈웃음치며 마음껏 뛰어놀 수 있고 우리만의 문패가 달린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단벌 숙녀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대단한 결단 심으로 인생의 절반을 정말이지 마라톤 러너처럼 뛰고 뛰어 숨 가쁘게 달려온 기분이었다. 의사들도 사기 어려운 삶을 담은 그릇이라는 주택을 감히 저 조끔 한 한국 간호사가 겁도 없이 장만했다며 병원이 시끌벅적했다. 내가 근무했던 병원 직원들은 유별나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소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잘 퍼뜨렸다.

1981년 4월에 새로운 원장이 부임했다. 수술 잘하는 젊고 유능한 교수가 부임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수술 환자가 현저하게 늘어나고 수술실 살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원장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기 위하여 일심전력했다. 다행히 남편이 집안일이나 아이들을 잘 돌봐 줘서 마음 놓고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쩜 나를 이해해 주는 꽃

받침 같은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한 필연이 아닌가 싶었다. 노랑 고무장갑이 없던 시절이어서 손에 주부습진이 생길 정도로 바삐 도왔다. 피곤한 남편의 어깨는 늘 눈부셨다. 마음 편히 쉬어 보지 못하고 쉬면 뭔가 불안할 정도로 일중독에 걸려 살아온 삶이다.

원장이 부임한 지 3년 만에 최신식의 수술실을 지어 8방에서 수술을 할 수 있는 시설로 확장했다. 난 수술실 수간호사 업무 외에도 위생관리, 중앙공급 실과 외래까지 총괄하게 되어 어깨가 더욱더 무거워졌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새로운 분야의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세미나에 참가하여 배우고 갈고 닦으며 차곡차곡 날 발전, 갱신해 나갔다. 신뢰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끝이라고 한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난 동료를 춤추게 할 만한 따뜻한 사람은 아니지만, 베풀 줄 알아야 거느릴 수 있다고 내게 주어진 권리만을 찾으려 하지 않고 늘 동그란 마음으로 협상 타협하며 어렵고도 고상한 대인관계와 인맥의 고리를 이어갔다. 마음이 환히 트여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머무르기 좋아한다고 내 귀와 마음의 휘장은 언제나 바로 세워 활짝 열려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대기 근무를 섰다. 정상 근무가 끝난 시간부터 시작하여 그 이튿날 아침 근무가 시작하는 동안이었다. 억세게 재수가 좋은 날은 잠자면서 대기 근무수당을 받았고 또 어떤 날은 계속 실려 들어오는 환자들을 밤 내내 수술하며 한숨도 못 잔 날도 있었다. 지금이야 엄격한 노동법이 근로자를 보호해 주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수술 일정에 짜여 있는 환자를 일손이 부족해서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가누며 꼼짝없이 연장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은 눈이 저절로 감길 것 같은 느낌에 손발을 점검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기도 하다.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면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 눈에서는 빛이 나고 손발에서는 불이 나게 일을 했다. 이럴 때면 대부분 간호사는 그 이튿날 모름지기 병가 病暇로 재깍 결근했다. 나 역시 온몸이 부서져 다 어긋난 것처럼 뼈 다기가 욱신욱신 쑤셔서 그런 생각을 했다가도 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잽싸게 일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를 위하여 끊임없이 종을 울렸을까? 나를 위하여? 아니면 환자를 위하여? 아니면 병원을 위하여? 아니면 독일 사회를 위하였을까? 난 정녕 환자를 위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선서문처럼 가슴 달구며 내게 한 신호등 같은 약속을 지키며 적나라하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대충대충 사는 모습보다는 기꺼이 변하는 용기와 결단을 한 과감한 힘, 내일 쓰러질지라도 오늘 할 일을 실천하는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불쑥불쑥 먼지처럼 떨어지지 않는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 눈뿌리가 아찔하고 혓바늘이 돋던 날들을 생각하면 서리 내린 꽃잎처럼 가슴이 시리다.

우리 부부는 역할 구분이 아예 없었다. 질서와 조화 속에 온 가족이 하나 되는 노력과 희생으로 우리 둘 중, 직장에서 먼저 돌아온 사람이 일사천리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밥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찬거리 시장도 보고 아이들도 보살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이 될 때까지 병원에 속한 온종일 유치원에 맡기고 출근해서 직장 일이 끝나면 집으로 데려왔다. 학교도 유치원에서 갔고 수업이 끝나면 유치원으로 가서 점심도 먹고 숙제도 그곳에서 했다. 근무를 마치고 일단 집에 돌아오면 이미 끝낸 숙제였지만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무언가를 잘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엄마로서 적어도 자식들 학교 수업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유별나게 날씨가 좋은 날엔 숙제를 빨리 끝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어린 마음에서 성의 없이 대강대강 했음이 드러났다. 글씨가 엉망이었고 산수 셈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처음부터 다시 하도록 해서 다시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시험을 앞두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살그니 기다리는 눈치였다. 자식 잘 키우는 것도 애국 애족이라고 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힘을 맞추며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 햇볕 같은 칭찬과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잘 키우려 애썼다. 아이들이 차츰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애들을 앞장세워 책방에 들러 읽고 싶어라 하는 책을 사서 책과 가까이할 수 있도록 습관을 길러 주었다.

두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가르쳤다. 선한 거짓말도 거짓말이기에 안 된다고 했다. 거짓말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자꾸 하다 보면 스스로조차 그것을 진실처럼 믿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와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도 일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난 아이들에게 마음을 곱게 쓰고 가슴을 읽어주며 별빛 같은 꿈과 희망을 크게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이상과 꿈이 작으면 성취하는 일도 작고 보잘것없다고 한다. 꿈은 팽팽한 현악기처럼 아름다운 음률을 내기 위해 삶을 긴장시키기 때문에 꿈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인간은 꿈을 꾸는 한 아름답다고 한다. 난 우리 아이들이 혹시 꿈과 희망보다 반항과 적의를 먼저 배울까?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가 침을 꿀컥꿀컥 삼키면서 내게 물었다. 대부분 친구 엄마는 직장에 나가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자식들을 데리러 오는데 왜 우리 엄마는 꼭 직장엘 나가야 하느냐고? 엄마도 자기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단다. 그리고 점심때 유아원이 아닌 우리 집에 가서 엄마가 지어준 따뜻한 쌀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난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만약에 엄마가 직장엘 나가지 않는다면 널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올 수도 있고 점심때 함께 따뜻한 쌀밥도 먹을 수 있지만, 네가 좋아하는 아디다스 신발이나 옷이나 네가 읽고 싶어서 하는 책 그런 것들을 살 수 없고, 어쩌면 우린 자가용도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었다. 엄마가 매달 벌어 오는 돈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금액이라고, 그래서 엄마가 일을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병들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도 없다고 했다. 엄마는 수술실 간호사여서 원장 선생님이 수술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도 했다. 작은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자기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좋으니, 엄마가 계속 일을 나가도 괜찮다면서 이젠 쓸데없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고 했다. 어린 자식에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말로 설명해 주면서 난 참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아들어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 후부터는 다시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아디다스는 아이들에게 대단한 인기 상품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쪽지 편지는 우리 집의 고마운 대화 꾼이었다. 알기 쉬운 표현으로 사랑도 전하고 소망도 전했다.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우리 식구는 무지개 쪽지 편지를 참으로 사랑하고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남편이 남긴 쪽지, 큰아들이 남긴 쪽지, 작은아들 꼬마가 남긴 쪽지, 내가 남긴 쪽지의 색깔은 변색하였지만, 추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지금도 그 고마운 대화 꾼은 마치 우리 집 가보 家寶처럼 예쁜 자개함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여보, 잠깐 시장에 가요. 서둘러 다녀올게요.'

'아빠, 연극 연습이 있어서 자전거로 학교에 갑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여기저기 창문 열어 뒀어요. 마틴은 축구 경기하러 갔어요. 팀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갔어요. 엄마, 아빠 오늘도 힘드셨죠? 양 볼에 뽀뽀!'

'엄마, 잠깐 마크 집에 갑니다. 오늘 점심 먹은 그릇은 내가 설거지했으니 그런 줄 아세요. 울 엄마, 최고!'

'독일어 시험 결과 나왔어요. 우리 반 평균 점수는 좋진 않지만 내 점수는 좋아요. 보너스 주실 거죠?'

'아빠, 내일 아침 일찍 시장에 가실 때 나도 따라갈래요. 소니 음악 카세트 사야 하거든요. 나 꼭 깨워야 해요. 아셨지요?'

'너희 화해했냐? 다 큰 녀석들이 웬 싸움이냐?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다. 누가 잘했건 잘못했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알았지?'

'사랑하는 아이들아, 엄마는 회의가 있어서 늦을 거야. 너희 학습 봐줄 시간이 없겠구나. 숙제 잘하고 동생 공부도 살펴 주렴. 달력에 동그라미 쳐 둔 내일은 엄마가 모처럼 쉬는 날이야. 너희가 좋아하는 불고기랑 뽀빠이처럼 힘이 솟는다는 시금치나물이랑 동그랑땡 부쳐서 맛있게 먹자꾸나. 모노폴리 게임도 하고 땅따먹기 놀이도 하고 온몸으로 웃음 지으며 우리 함께 봄이 되는 거야. 난 지금부터 한바탕 신이 난다.'

주머니 속 구슬처럼 소중했던 그때의 도란도란 추억으로 평생이 들썩들썩 즐겁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남편이 목숨 걸듯 살았던 광산촌으로 나들이하였다. 어둠을 깨물면서 비지땀도 감사해하며 살았던 20여 년이 지난날들을 선명히 기억하는 남편은 그 당시에 사용한 탈의장, 공동욕실, 휴게실, 숙소 등 탄광 주변을 안내했다. 뜨거운 가슴 빛으로 동그랗게 안으며 수고에 열중한 숱한 날의 아픔으로 묶었던 설움을 녹인 시간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기 삶에 더 충실하고 부모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분발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알토란 같은 두 녀석은 집에서는 응석꾸러기였지만 밖에서는 속 깊은 어른이었다. 부모가 부족하면 아이가 빨리 철이 든다고 했던가? 제대로 호강시켜 주지 못하고 엄마의 잔 손길이 가장 많이 필요할 때 마음껏 함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맷돌로 돌리듯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숟갈이 많아야 밥맛도 좋다고 내 살 같은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저녁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정직히 깔린 방울땀의 하루 허리를 펴는 시간이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는 생활은 작은 축복 같았다. 음식은 마음이다. 더군다나 정성이 무르익은 엄마의 손맛이 배어 있는 음식이야말로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중한 끈이다. 사랑하면 먹이고 싶어진다고 먹는 모습만 봐도 어미는 배가 부르고 행복하다. 꽈리처럼 터질 듯 서로를 일으키며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은 가족의 소중함과 남아 있는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은 행복이고 위로였다. 자식한테 욕심 없는 부모 어디 있으랴? 잘난 자식도 내 자식이고 못난 자식도 내 자식이고 내 보물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잠자코 지켜보며 기다려 주고 눈 찡긋 윙크하며 한편이 되어 긍정의 외투를 입혀주며 철통 밀통 믿어주고 떨리게 응원하는 것이다. 두 아들은 학업에 열중하여 큰아들은 의대를 졸업 후 경력을 쌓아 정형외과, 구급 외과 전문의로 병원을 개원하여 히포크라테스의 본질을 정중히 거울삼아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정직하고 성스러운 노동으로 주어진 몫에 충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일자리를 내 집처럼 가꾸며 살아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불편한 몸으로 찾아온 연로하신 교민들을 성심성의껏 치료해 주고 싶다는 사명감이 남다른 아들의 갸륵한 마음이 참 아름답다. 작은아들은 상대를 졸업하여 보장된 직책에서 소신껏 일하고 있다. 둘 다 가정을 이뤄 터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에게 가족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고 삶의 전부이다. 가족 안에는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이야기보따리가 숨어있는 듯하다. 자식과 골프는 마음대로 안 된다는데 열악한 생활 환경에서 이탈하지 않고 독하게 공부하여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올바르게 장성 長成해 주었음을 그지없이 고맙게 생각한다. 힘들게 키운 튼실한 뿌리 깊은 두 아들은 언제나 내 가슴에 향기 젖은 감사로 울렁이는 나의 자랑이고 큰 힘이다. 지난 고된 삶의 흔적을 그대로 보상받은 느낌이다.

남편의 꿈은 '남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야 한다'라는 은사 님의 말씀이었다. 원래 기본적인 것이 가장 확신적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 부부는 검정이와 하얀 이로 시작하여 꿈은 뼈를 깎는 시련과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며 한 단계 한 단계 이뤄갔다. 58년 전 그 젊고 건장한 청년이 땡전 한 푼 없이 20㎏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가지고 서독에 와서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이역만리 떠나온 간호사와 꽃씨처럼 사랑을 나누며 가정을 이뤄 두 붕어빵 아들을 얻었고 며느리 손주까지 일곱 가족 만들었다. 우리 모두 건강하고 돌담 쌓듯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맘 다해 큰사랑이 되도록 애쓰며 살아가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큰 은혜인가?



우리 엄마는 진달래꽃을 무척 좋아하셔서 분홍빛 꽃을 머리에 꽂고 다니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진달래가 활짝 핀 5월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문풍지처럼 떨리는 조카의 전화를 받고 목이 꽉 잠겨버리고 온몸에서 썰물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아이들은 눈물을 닦아주며 날 위로했고 남편은 장례식에 참석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재촉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긴 시간 내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줄줄이 바퀴를 돌렸다. 지난번 한국에 나갔을 때 하얗게 시린 달빛 아래 박꽃 같은 순한 웃음을 지으시고 줄곧 단내나는 숨 고르기를 하며 지내시다가 독일로 다시 돌아가는 날, 어찌 이리 날짜가 빨리 갔는지 보내는 마음이란 살점 한 움큼 떼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라며 눈가에 눈물이 붉게 물든 얼굴로 언제 또 올 거냐며 다짐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삼삼히 떠올랐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엄마는 일평생 우리 팔 남매의 밑거름되어 모든 근심 걱정 꿰매시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다. 큰오빠의 실수로 끼울 어진 가정 형편에 괴로워하시며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입에 붙은 찬송가 가락을 되뇌며 침침한 눈으로 성경을 읽으시고서 심지가 약해지지 않게 나날이 달빛과 별빛에 손 모으며 평안함을 찾으려 무릅쓰셨다. 목이 긴 기다림에 기울어 손가락을 꼽던 하루하루, 부모 자식 인연으로 오손도손 살지 못한 아쉬움,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데 멀리 떨어져 살면서 섬김의 시간을 놓쳐버린 죄책감, 상처보다 오래 남는 것이 죄의식이라고 이제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회초리로 맞은 듯 가슴이 미어진다. 살아보니 나중은 없었다. 왜 이제야 절절히 깨닫는 것일까? 이역만리 외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불효였다. 난 엄마에게 평생 아픈 새끼손가락이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내게 아픈 손가락이다. 덩그런 징 소리로 울리는 끝없는 바닷속같이 깊은 사랑인 어머니! 거룩한 날개 그늘에 고이고이 잠드소서! 먼 날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두 분의 무덤에 잊지 못한 마음처럼 패랭이꽃을 피우겠습니다.

난, 가끔가다 꿈결에서 솔바람 등에 업고 홑이불처럼 덮인 추억을 찾아 햇살이 뜰에 뛰놀고 안마당 한쪽으로 올망졸망 꽃이 웃고 댓돌에 놓인 눈에 익은 고무신 두 켤레와 듬직한 아버지의 등이 보이고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가 있고 무슨 짓을 해도 이쁘던 개구쟁이 꼬마 조카들과 북새통을 이뤘던 배냇짓 고향 집을 한 바퀴 휘돌고 온다.

2009년 7월 18일, 병원 근속 40년을 맞이한 날이다. 독일에서는 근속 25주년과 40주년을 매우 중요시하고 큰 행사를 한다. 그날 행사의 첫 순서로 내 분수에 넘치는 병원장의 축사와 독일 기독교 재단으로부터 최고의 디아코니아 훈장 증정이 있었다. 많은 축하 인사와 꽃다발, 귀한 선물도 받았다. 그날 하루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날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선물은 동료들이 구상한 연극 한 토막이었다. 호화찬란한 연극은 아니었지만, 무척 애를 쓴 듯 보였다. 그 첫 장면은 수술 환자를 눕혀 놓고 간호사들이 규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하는 모습이다. 껌을 짝짝 씹으며 껌으로 풍선을 불어 터뜨리기도 하고 볼연지 두들겨 가며 요란스럽게 화장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아주 짧고 야한 수술 가운을 입고 엉덩이를 맞대고 의사들과 어울려 목젖이 환히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직원들이 두려워하는 간호사가 나타난다. 갑자기 들이닥친 간호사 앞에서 당황한 그들은 쩔쩔매며 그 자리를 수습한다.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잘못된 현장과 그들의 태도를 하나하나 지적하는 그녀는 동양 여자여서 화장도 마치 동양인처럼 보이게 했고 동양 사람 악센트를 넣은 말투를 썼다. 그 깐깐한 간호사는 바로 나를 비유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긴장감마저 감도는 한 장면 한 장면의 연기를 어찌나 잘 해냈는지 비눗방울처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통째로 주어진 뜻깊은 하루를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꽃밭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덕담을 나누고 지인들이 각각 공들여 만들어 온 한국 음식을 함께 나누며 웃음꽃 한 바구니 내려놓고 눈물 나게 행복한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참되게 사는 사람에겐 두려움이 없다는데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할수록 남 탓을 하게 되고 침도 안 바른 입술로 뻔한 거짓말, 엉뚱한 변명을 먼저 한다고 한다. 난 평소에 동료가 어떤 잘못을 했을 경우, 진상을 정확히 파악해 규명하고 거기 따른 질책과 책임을 추궁해서 다시는 복사판 같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자의 명목으로 엄격하고 야무지게 마무리했다.

2010년 4월에 신경을 칼날처럼 세워야 하는 수술실 간호사로 41년의 직장생활을 끝마치고 정년퇴직했다. 난 꿀 먹은 벙어리로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로지 한 우물을 쉼 없이 파며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낌없이 감당하며 시련 속에 꽃피는 연꽃처럼 순응의 지혜를 배우며 과분한 능력과 공로를 인정받은 수간호사직까지 거쳤다. 내 인생의 절정기와 황금기를 이곳에서 맞았고 나의 젊음과 영혼을 고스란히 이곳에 바쳤다. 나의 인생은 위대하거나 크게 내세울 건 없지만 각시탈 웃음 띠며 야생화의 끈기와 강한 의지로 묵묵히 참고 이겨낸 삶이었다.

은퇴한 후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그 옛날 문학소녀 시절에 분홍 리본 꿈 달고 생각 주머니를 키우며 즐겨 썼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40여 년 동안 쌓였던 온갖 설움이 복받쳐 오름을 느꼈다. 마치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2016년에 M 한국 문단에 늦깎이 작가로 등단이 되어 서울에서 있는 등단 식에 참여하는 영광을 가졌다. 가족, 지인, 유리알같이 맑은 꿈 많던 고향 친구들이 한달음에 달려와서 크게 축하해 주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슴 뜨거운 날이었다. 말과 글은 민족의 생명이 되는 것처럼 우리 말을 사랑하며 독일 하늘 아래 세월이 남긴 우리네 이야기를 알알이 꿰어 독자를 진한 감동으로 출렁이게 하고 쓰러진 것을 세워주고 보듬어 주는 마음으로 숨 멎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 이제 다리가 아프고 팔도 아프다.



그래도 나지막한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갈증을 풀어내고 싶은 간절함으로 부단히 써야한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호사라는 직업을 빼고 내 인생을 말할 수 없다. 간호사를 중심축으로 평생의 삶이 이루어졌다.

간호사로 친구를 사귀었고, 간호사로 일하고, 간호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눈물 꽃 맺고

풀면서 놋그릇처럼 닦았다. 한번 간호사이면 영원히 간호사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슬픔이 반이 되었던 오래되어도 빛나는 초록 마음 가득한 인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 곁 가슴께 살아 있는 가을 햇귀 같은 고마운 사람들이 시나브로 하나둘 떠나간다. 시큰한 눈물 자국 함께 밟고 가자던 동료가 보고 싶다. 독일 땅에 뿌리를 내린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조국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삶으로 조국에서는 물론 이 독일 땅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코리안 천사'로 길이길이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애당초 3년의 고용계약이 반세기를 훌쩍 넘어 장장 54년의 머나먼 경주가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아프게 절룩이는 해어진 짚신 한 짝 같은 타향살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 세월 속에 윤슬 같은 꽃 청춘도 묻혀버렸다. 이제는 내 지갑에 든 시간도 많이 얇아졌다. 철새의 울음 같은 그 긴 세월에는 웃음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미움도 있었다. 어느덧 꽉 찬 나이에 씩씩했던 어깨가 꺾어진 채 잠이 들고 주름진 얼굴엔 거뭇거뭇 검버섯이 피어 번지고 검은 머리에 내린 백설은 봄이 와도 녹지 않는다. 빈소라 귀에 바람이 인다. 움츠리는 자라목에 허리뼈가 시큰거리고 물안개 사라지듯 흐려지는 기억은 입에서 감감 돌면서 생각이 안 나는 단어가 종종 있다. 살아가면 고향이라고 이제는 박하사탕 같은 나라 독일에서 하늘의 은총 같은 파릇파릇 손자들과 까르르 웃음소리 굴리는 옥구슬 같은 손녀랑 시간을 묶어 두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큰소리를 치며 아무것도 못 본 척 딴청을 부리면서 샛별눈하고 작은 가슴 조마조마하며 애써 꼭꼭 숨은 달덩이들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봄날의 꿈처럼 행복한 술래 할머니가 되었다.

"뿌리를 뽑아 국경을 넘어 다른 땅에 다시금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

니었습니다. 내 힘으로 얻어야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처럼 소리 없는 열화 熱火로 홀로

서기를 하였습니다. 나의 서러움과 눈물, 노력과 열정, 인내와 성실이 여러 색깔로 수

놓은 희로애락이 널을 뜁니다. 난 어떠한 난간에서도 거짓 없는 몸짓으로 한 조금 부

끄럽지 않게 대한의 딸로 온 힘을 다하여 당당하게 살았음을 감히 장담합니다. 내가

낮아질 때 네가 보이는 것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이제 더는, 불평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않으며 주님의 깊은 섭리 안에서 넉넉한 느낌, 깨끗한 행동, 사랑받는 사람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옹골지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위대하신 주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무거웠던 웃음이 여울져 울렁이는 지금, 이 행복이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문득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다. 문득 고향을 불러볼 때도 있다. 바람이 넘기는 책장처럼 가버린 허망한 세월 따라 창에 비친 얼굴, 엄마를 떠올릴 때도 있다. 과거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눈시울 적신 시절을 넘나든 아픈 세월이 닳도록 지문이 되었다. 지나간 그대로 오늘을 감사하며 뼛속까지 자란 인내의 힘으로 차분히 살피면서 한 생을 나누어지고 닮아가는 우리 부부는 오늘도 마음을 다해 축 이룬 삶의 수레바퀴를 소소히 굴린다. 보드레한 하늘엔 구름 한 점 한가롭다. 싱그런 풀빛이 짙어지는 5월에 살랑살랑 얼굴에 와 닿는 꽃바람이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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